석양의 빛으로 봄의 무수한 비애(悲哀)를 아는 어느 노객의 고심
다가오는 봄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는 어느 노객의 고심(苦心)이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봄을 바라보는 노객의 마음은 젊은이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젊은이에게 봄은 시작이지만, 노객에게 봄은 지나온 세월의 또 하나의 사건들과 그 확인이기 때문이다. 새싹이 돋고 꽃이 피어나는 광경은 아름답지만, 동시에 그것은 같은 그 시간의 흐름이 또 왔음을 말해 준다. 그래서 노객은 봄의 기쁨보다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을 느낀다.
자연은 조금만 더 보면 진실이 드러난다. 봄은 단지 시작의 계절만이 아니라 사건의 계절이기도 하다. 겨울을 견딘 나무만이 봄에 꽃을 피운다. 겨울이 없었다면 봄의 꽃도 분명히 없을 것이다. 하나 노객의 봄에 대한 세월은 단순하지만은 않다. 겨울의 눈보라 속에서 견디고, 때로는 잎을 떨구고, 때로는 가지가 부러지기도 했다. 그러나 겨울 후의 봄은 결코 단순한 계절이 아니었다. 삶에서 이루어 낼 수 있어야 하는 노고가 따라온다.
젊은 날엔 그도 무엇이든 이루어야 한다고 믿었다. 무언가를 더 얻고, 더 올라가고, 더 증명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러나 세월을 견디고 온 노객에게 봄의 교훈은 의외로 매우 위험했다. 성취보다 통과가 고통이었다. 그는 많은 것을 이루면서 살아왔다고 여겼지만, 사실은 수많은 시간을 운 좋게 잘 지나왔을 뿐이다. 폭풍을 지나왔고, 강물을 타고 왔고, 천적을 피하고 욕망과 실패를 거쳐왔다.
그 모든 통과가 그를 노객으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그는 봄을 불안하게 바라본다. 봄은 무엇을 더 주는 계절만이 아니다. 이렇게도 말하는 계절이다.
“귀하는 여기까지는 잘 왔다. 계속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지켜 봐주마.”
그래서 봄은 안전한 계절의 장소가 아니라 살펴보고 경계해야 할 풍광이 된다. 젊은이들은 세상을 자기를 향해 달리지만, 노객은 가족을 위하여 세상을 미리 읽는다.
꽃이 피는 속도를 재고, 욕망이 지나가는 길목을 터득하고, 가족이 넘어야 할 협곡을 안다. 이 앎이야말로 노객이 아는 불안의 뿌리이다. 그래서 봄을 맞이하는 노객은 봄의 불안을 예기(豫期)한다. 봄이 오면 꽃을 보듯, 비가 오면 빗소릴 듣듯, 가족이 지나쳐야 할 협곡의 풍광을 미리 위에서 내려다본다. 그러면 불안은 조금씩 사라지고, 대신 묘한 평온이 깃든다. 세월은 노인에게 많은 것을 빼앗았지만 큰 거 한 가지를 상단에 난문으로 남겨 두었다. 그것은 '너 자신은 버리고 가족의 노둣돌이라도 돼라'는 것이다.
젊은이는 미래 때문에 고무(鼓舞)되지만 노객은 이미 인생의 대부분을 몸으로 통과했다. 그러기에 오히려 현재를 깊이 볼 수 있는 자가 된다. 다가오는 봄은 자신의 계절이 아니라 가족에 내린 벙크 홀(Bunker Hole)의 조용한 축복이다. 그러니 노객은 가족을 위하여 봄의 온기를 경계와 헌신으로 맞이한다.
봄은 당신에게는 묻지 않는다. 더 무엇을 이루겠냐고?
봄은 단지 말할 뿐이다. "정녕 불안하면 연로한 그대는 빠져도 좋다. ㅎㅎ"
그래도 노객은 말한다. “천천히 혹은 뒤에서 걷더라도 가족을 위하여 귀하를 지켜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