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초에 잠깐 경주여행을 갔다 왔다. 경주는 국민학교 때 수학여행 갔다 온 이래 수십 년 만에 다시 가 보는 곳인데, 내가 어릴 때 보았던 그곳과 같은 장소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모든 것이 바뀌어 있었다. 봄날의 경주라는 마법의 장소로 아름다운 시간여행을 갔다 온 느낌이다.
내가 경주에 처음 간 것은 초등학교(그 당시에는 국민학교라고 불리었다) 6학년 수학여행 때였다. 처음 간 수학여행에 많은 기대를 했지만, 내가 처음 본 경주는 끔찍한 기억으로 남았다. 한 반의 여자아이들을 한방에 자게 했다. 큰 여관방이긴 했지만 그래도 30명이 넘는 어린이들이 한방에 같이 자기에는 공간이 너무 좁아 제대로 눕지도 못하고 반쯤 벽에 기대어 밤을 새웠다. 식사는 더 형편없었고, 불국사를 지나 석굴암 가는 산길은 너무 구불구불하고 험해 버스 안에서 멀미로 토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경주 유적지에서 무엇을 보았는지도 잘 생각이 안 나고 끔찍했던 기억만 남았다. 그래서 경주는 다시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고등학교 다니는 아들이 부산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왔는데, 큰 호텔에서 2인 1실로 묵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격세지감을 느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경주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당시 열악했던 수학여행 시스템의 문제였던 것 같기도 하다.
사람들에게 경주가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천년고도라서 볼거리도 많고 특히 봄날에 경주를 가면 벚꽃도 많이 피고 신라의 달밤도 참 아름답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나도 다시 한번 경주를 가 보고 싶었다.
사람의 기억은 주관적일 수 있으니까, 지금은 다른 아름다운 경주가 있을 것 같았다.
4월 1일에 고속버스를 타고 경주고속버스터미널에 내렸다. 내리자마자 도로 여기저기 화단에 심어져 있는 노란 수선화가 먼저 봄 인사를 건네왔다.
근처 황리단길로 걸어가는 도중에는 만개하기 시작한 화사한 벚꽃도 보이기 시작했다. 목련은 벌써 지려는지 큰 꽃잎을 통째로 떨구고 있었다. 옛날 교과서에 실렸던 피천덕의 인연이라는 에세이에 보면 목련꽃 이야기가 나온다. 아사코라는 예쁜 일본 소녀와 세 번 만난 이야기인데 시절인연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리워하는데도 한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피천득의 인연 중에서>
같은 사람도 언제 어디서 만났는지에 따라 느낌이 다르듯이, 도시도 언제 누구랑 어떻게 보았는지에 따라 완전히 다른 도시일 수 있다. 옛날에 읽었던 바카라 중에 저자가 젊은 시절 프랑스 파리에 살았던 이야기가 있었다. 가난한 공부하는 남편을 따라 파리의 다락방에 살았는데, 그 당시 너무 가난해 춥고 힘들었던 기억만 가득해 파리가 아름답다는 생각을 못했다고 한다. 나이 들어 경제적 여유가 생기고 나서 파리를 다시 가 보니 파리가 그렇게 여유롭고 반짝이게 아름다운 곳이었다는 이야기였다.
내가 어릴 때 수학여행 갔던 경주도 나이 들어 다시 찾은 경주도 같은 경주일 것이다. 경주가 변했을 수도 있지만, 내가 변했거나 내 여행 여건이 변했을 가능성도 크다.
낮의 경주도 아름답지만, 밤의 경주 야경도 신라의 달밤이라는 호칭에 걸맞게 참 아름다웠다.
낮에도 눈에 훤히 보이는 쉬운 길도 못 찾는 소문난 길치인 나로서는 밤에 혼자 유적지를 찾아다니기에는 어려움이 많을 것 같아 야간시티투어 버스를 타고 해설사가 안내해 주는 경주 야경투어를 나섰다. 저녁 6시 반에 출발해 3시간 정도 동궁과 월지, 첨성대, 계림, 교촌마을, 월정교까지 경주의 유명한 야간 명소를 밤벚꽃도 보면서 걸어 다녔다. 가이드가 같이 다니면서 역사적 의미도 설명해 주어서 혼자 다닐 때 보다 공부도 많이 되었다. 첨성대도 낮에 볼 때와 밤에 볼 때 느낌이 많이 달랐는데, 야간 경관조명과 미디어아트의 힘인 것 같다.
불국사를 어릴 때 수학여행 갔었던 기억이 있어 다시 한번 가 보았다. 이번에는 봄날에 벚꽃이 활짝 핀 날에 가서 그런지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어릴 때 보았던 석가탑과 다보탑도 그대로 있었지만, 지금은 내가 어른이 되고 여행 경험이 많아져서 그런지는 몰라도 많은 것이 변한 것처럼 보였다. 여행은 누구랑 언제 어떻게 가는지에 따라 느낌이 많이 달라지는 것 같은데, 날씨가 여행의 반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봄날에 벚꽃이 만개한 곳을 지나가다 보니까 모든 것이 눈부시게 아름답게 보였다.
불교 용어 중에 시절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시절인연은 불교에서 '모든 일이 적절한 때가 되어야 이루어진다'는 뜻인데, 시절인연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데도 사용되지만, 모든 것이 때가 있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내가 두 번 경주에 간 것도 시절인연인 것 같고, 봄날의 아름다운 경주를 시간여행을 통해 본 것도 시절인연인 것 같다.
글 : 이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