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실패로 돌아간 십자군 전쟁

십자군 운동과 중세미술

by모두를 위한 미술사

예루살렘의 통곡 소리와 함께 성지에 피의 십자가를 세운 서유럽인들은 그것이 영원한 구원의 시작이라 믿었다. 그러나 1099년의 성공은 위대한 승리의 완성이 아니라, 수백 년간 이어질 비극과 혼란의 첫 장에 불과했다.


성지에 세워진 예루살렘 왕국을 비롯한 4대 십자군 국가들은 수적으로 압도적인 이슬람의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고립된 섬과 같았다. 서유럽 본국의 지속적인 지원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한 불안한 운명을 안고 있었다.


분열되어 있던 이슬람 세계가 전열을 정비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모술의 통치자 장기가 이슬람 세력을 결집하여 1144년 최전방의 에데사 백국을 재탈환하자 서유럽은 다시 한번 공포에 휩싸였다. 이에 교황 에우제니오 3세의 제창으로 결성된 제2차 십자군에는 프랑스의 루이 7세와 독일의 콘라트 3세 등 국왕들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다.


그러나 군주들 간의 불신과 비잔티움 제국의 냉대, 그리고 무모했던 다마스쿠스 공성전의 실패로 인해 제2차 십자군은 아무런 성과 없이 처참한 모욕만을 안은 채 회군하고 말았다.


12세기 후반, 이슬람 세계에는 아이유브 왕조를 창건한 위대한 지도자 살라딘이 등장했다. 1187년 살라딘은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 주력 부대를 완벽히 궤멸시키고 마침내 예루살렘을 재탈환했다. 88년 전 십자군이 벌였던 참혹한 대학살과 달리, 살라딘은 시내 기독교인들의 목숨과 재산을 보장하는 관용을 베풀어 서유럽에 더 큰 충격을 주었다.


성지를 빼앗겼다는 소식에 영국의 리처드 1세와 프랑스의 필리프 2세,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가 이끄는 제3차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비록 프리드리히 1세의 익사와 필리프 2세의 조기 귀국으로 전쟁은 리처드 1세와 살라딘의 대결로 압축되었으나, 두 영웅은 치열한 공방 끝에 “예루살렘은 이슬람이 지배하되 무장하지 않은 기독교 순례자의 방문은 허용한다”는 평화 협정을 맺으며 전투를 마무리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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