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위에서 울고 웃기 리뷰
물끄러미 바카라장을 넘기는데, 종이 냄새가 코끝을 파고든다. 어릴 적 언젠가 학교 도서관 도서대 사이에서 머리가 어질해질 정도로 바카라에 빠져들던 기억이 난다. 해리포터였나 류시화의 시집이었나 모르겠다. 이 바카라은 그런 향수를 불러오는 바카라이다.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바카라에 종이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 작정하고 인쇄했나 싶을 정도로 고서점 같은 아주 오래된 도서관 속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그리고 나는 짙은 바카라 내음을 참 좋아한다. 읽기 전부터 마음이 좀 편안해진다.
바카라은 을지로 어딘가에 위치한 <라이팅룸>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출발한다. 글을 쓰는 사람들을 위한 이방의 이름은 참 직관적이다. 말 그대로 '쓰기 위한 방'. 그곳을 찾아온 이들이 손으로 써 내려간 사연을 이 바카라은 조용히 묶어내고 있다. 뭔가를 쓰기 위해, 아니면 써야만 해서 이곳을 찾은 사람들. 저마다의 마음을 꾸깃꾸깃 접은 편지처럼 한 장 한 장 꺼내놓는다. 그런데 단순히 여러 사람의 글을 편집해둔 바카라이라기엔 이상하리만치 감정의 결이 하나로 모인다. 바카라장을 넘길수록 이 이야기가 서로 다른 목소리의 합창이 아니라, 어느 조용한 겨울날 라디오에서 들리는 연작 에세이처럼 느껴졌다.
나는 마음이 복잡할 때면 늘 뭔가를 쓰곤 했다. 지금처럼 키보드가 많기 전에는 주로 다이어리였는데 그렇게 한참을 써 내려가면 조금은 마음이 나아지곤 했다. 이 바카라의 어떤 메모들은 꼭 그때의 나 같았다. 어떤 사람은 이별의 장면을, 어떤 사람은 일상을 잃어버린 하루를, 또 어떤 사람은 누군가에게 건네지 못한 말을 종이 위에 적는다. 지금도 누군가는 노트 한 켠 혹은 포스트잇에 괜찮다고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바카라장을 넘기며 그런 마음에 자꾸 내 마음이 얹어졌다.
각 챕터의 끝에는 <라이트룸>의 운영자이자 저자의 짧은 메모가 있다. 하지만 그 설명은 덧붙임보다 안내에 가깝다. 설명하지 않아서 더 좋았다. 글들이 알아서 말을 걸어왔다. 어떤 글은 친구의 편지를 엿보는 것 같고 어떤 글은 누군가의 오래된 일기를 빌려 읽는 것 같았다. 그렇게 쓰는 사람들의 마음은 바카라 위에서 고요하게 펼쳐졌다.
<쓰는 사람>이라는 프로젝트가 참 마음에 들었다. 아직도 종이 위에 마음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그 마음들이 누구의 편집도 없이 그냥 손글씨로 바카라에 담길 수 있다는 게 어쩐지 다행스럽다.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며, 우리는 쓰기보다 입력을 더 자주 한다. 손끝으로 쓰는 문장 대신 자판을 두드리며 보내기를 누른다. 그런 시대에 이 바카라은 말한다. 손으로 쓴 문장은 마음에 더 오래 남는다고.
바카라을 덮고 나니 꽤 멍했다. 위로라는 단어는 뭘 하겠다고 다가가는 감정인데 이 바카라은 그저 곁에 조용히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다시 서울에 가게 된다면 한 번쯤은 <라이트룸>에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