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와 나의 바카라장

<읽는 사이>를 읽고

by정희

그들을 한참 구경하다 보니 문득 나도 해보고 싶은데,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한다고 뭐가 달라지진 않겠지만, 하지 않으면 정말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 같은. P92-93




김겨울 작가는 <바카라의 말들>에서 이렇게 말했다. “유년기의 바카라장은 우리 집에 있지 않다. 유년기의 바카라장은 남의 집, 학급문고, 도서실, 도서관, 만화방 등에 산재해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보여 주는 바카라이 나의 바카라이 되고 너의 바카라이 된다.” P103 김겨울 작가가 언급한 이 바카라장들에 나는 하나를 더 보탠다. 우리 집 바카라장에 꽤 오래전부터 자리 잡은 한 칸, 바로 ‘H의 바카라장’이다.


H와 나는 2007년 겨울, 일로 만난 사이이다. 이 글을 쓰며 기억을 더듬어보니 처음부터 이렇게 가깝진 않았던 것 같다. 서로에게 약간의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순전히 내 피셜) 특별한 사이가 되기엔 뭔가 부족한 뜨뜻미지근한 사이였던 것 같다. 그러다 2009년쯤 내가 많이 아파서 몇 달 입원한 적이 있었는데 퇴원 후 다시 만났을 때 H가 바카라과 손편지를 건넸다. 그때 받은 바카라은 윤대녕의 <대설주의보>였고 오래 아팠다가 복귀한 나에게 보내준 그녀의 환대는 감동 이상의 무엇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바카라과 삶 속으로 조금씩 들어와 우정을 이어나갔다. 몇 년 후 H의 외국생활이 결정되어 이제는 21세기 견우와 직녀처럼 일 년에 한 달 남짓만 같은 하늘을 이고 지내지만 11개월의 공백은 우리 앞에 아무 의미가 없다. 1년 만에 만나도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할뿐더러 어색함은 1도 없어서 때론 진짜 외국에 계신 게 맞나 의심(?)될 때도 있다.


물론 SNS 덕분에 서로의 일상을 실시간으로 공유할 수 있게 된 영향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영향을 주는 건 H가 남기고 간 바카라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일 년 동안 읽은 바카라 중에서 혼자 읽기 아까운 바카라이나 서로의 바카라 리뷰를 보고 ‘이거다!’ 싶어서 찜콩한 바카라으로 서로의 바카라장을 침범하는 것이다. 그녀의 손때가 묻은, 어쩌면 마른침도 묻었을 바카라을 함께 읽으며 다음 해 여름을 기다린다. 바카라 속에서 어쩌다 밑줄을 만나면 H를 만난 듯 반갑고 공감하는 곳에 그어진 밑줄을 보면 마음과 마음이 만난 것 같아서 찡하다. ‘읽는 사이’란 이 얼마나 애틋한지.(이 글을 쓰는 중에 뜨거운 뭔가가 올라왔나 보다. ‘Sia’의 ‘Snowman’이 흘러나와 잠시 눈을 감았는데 난데없이 눈물이.. 아 당황스러워라… 진짜 의식의 흐름 뭐냐)


이 바카라을 본 순간 우리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반가워서 얼른 구입해 읽은 게 지난겨울, 그런데 좀처럼 리뷰를 올리기 어려웠다. 너무 좋은 바카라이고 애정 하는 작가님들의 글이라 더더 잘 쓰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을까. H와 나의 이야기도 담고, ‘사이’라는 말에 담긴 특별한 경험도 풀고, 독립출판물의 세계에 관심 갖게 한 구달 작가님의 다른 바카라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싶고, 바카라 뒤편에 실린 김혼비 작가님의 짱짱한 리뷰도 자랑하고 싶고 이 바카라에 담긴 사랑스러운 바카라 이야기도 마구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애정이 부풀수록, 하고 싶은 말이 쏟아질수록, 어디부터 주워 담아야 할지 엄두가 안 났다. 그때마다 미루고 미뤘다. 하지만 더 이상은 미룰 수 없는 때가 왔다. H가 한국에 방문하는 6월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서로의 바카라장을 비우고 채워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이제는 깜빡 깜빡이 거의 실시간이라 지난 일 년 동안 무슨 바카라을 찜했는지 퍼뜩 기억나지 않지만 이 바카라만큼은 애써 기억할 필요가 없다. 서로 다른 바카라 취향을 가진 두 작가의 독서 교환 일기라는데 우리가 안 읽을 수 있겠는가. H도 나처럼 이 바카라을 읽을 때마다 같은 듯 다른 우리의 취향 차이를 확인할 것이다. 그 다름에도 불구하고 오래 이어온 인연에 담긴 노력도 떠오를 것이다. 2007년 겨울, 처음 만난 순간을 잊지 못하는 나처럼 이 바카라을 읽으며 우리의 처음이 기억날지 모른다.


함께 읽지만 결코 같아지지 않는 우리의 다름이 나는 좋다. 서로의 세계를 인정하고 좋은 것은 나누고 싶어 하는 우리의 적당한 ‘사이’가 참 소중하다. 읽고 보고 듣는 것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때 함께 받쳐 줄 손가락이 있다는 사실은 더할 수 없이 든든하다. 그래서, 그러므로,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우리는 조금도 낡지 않았다고 막 우기고 싶다.



#읽는사이 #구달 #이지수 #제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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