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준이가…….”
“엄마, 아니에요, 누나가 먼저……”
하루에도 수십 번 불러대는 ‘엄마, 엄마’. 모른 척 넘어가려는 엄마 속도 모르고 아이들은 억울하고 속상한 마음을 굳이 와서 일러바치고 간다. 함부로 편들 수 없고, 잘못을 따질 솔로몬의 지혜도 없어서 난감한 마음만 눈처럼 쌓인 지 벌써 일 년째다. 피부가 되어 버린 마스크, ‘돌밥’(돌아서면 밥)에는 익숙해졌지만 수시로 투닥거리는 아이들에겐 좀처럼 너그러워지지 않는 요즘, 엄마로서 존재하는 일상이 길어질수록 나를 잃어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갑갑한 마음 사정은 아이들도 마찬가지인지 대수롭지 않게 넘기던 사소한 표정 하나에도 다투기 일쑤였다.
그렇게 한 겹, 두 겹 쌓인 마음의 무게를 버티지 못할 때면 집을 나섰다. 그대로 뒀다가는 미친 듯 소리 지를까 두려운 마음이 그 자리에서 나를 떼어 냈다. 침잠의 시간에 나를 흠뻑 담가 지친 마음을 보듬어야 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마땅히 갈 곳 없는 나에게 집 앞 공원은 완벽한 피난처였다. 탁 트인 그곳을 하염없이 걸었다. 나를 에워싼 공기와 나의 한걸음에만 집중했다. 그렇게 내 안으로 숨어들어도 오감은 저절로 열리는 마법 같은 공간이었다. 보드라운 바람이 뺨을 어루만지게 내버려 뒀다. 따스한 햇살은 목덜미를 파고들어 온몸을 데웠다. 더운 피로 손끝이 짜르르해질 때쯤이면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것들은 증발되듯 사라졌다.
시간마다 달라지는 햇살과 노을의 풍경은 아무 말 없이 나를 품어줬다. 봄은 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계절의 향기 속에 나를 안아줬다. 그 시간과 계절에 나를 맡긴 채 걷다 보면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동생을 데리고 나온 어린 형아의 의기양양함이 귀여워서 저절로 미소가 스몄다. 반려견과 대화하는 사람들의 다정함, 호수 위에서 유유자적 물질하는 청둥오리의 여유가 나에게도 옮겨오는 듯했다. 크게 틀어놓은 아저씨의 트로트 메들리에도 눈살이 찌푸려지기보다는 알 수 없는 인간애가 솟아났다. 그 음악에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발맞춰 걷다 보면 뾰족했던 마음도 둥글둥글 다듬어졌다. 진지함을 반쯤 덜어내니 세상 일이 다 괜찮아졌고 속상했던 일도 ‘그럴 수 있지’의 마음으로 슬그머니 바뀌는 놀라운 일이 반복됐다.
그 길 위에서 한 엄마를 보았다. 6-7살 된 딸과 함께 바닥에 주저앉은 그 엄마의 턱에는 흘러내린 안경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도움이 필요한 것 같아서 다가가 보았더니 한 남자아이와 그 아이의 아빠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연신 사과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씽씽카를 타던 어린 남자아이가 속도를 늦추지 못하는 바람에 마주 오던 모녀와 부딪친 모양이었다. 씽씽카와 부딪친 여자아이는 크게 다친 곳이 없어 보였지만 놀란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서럽게 울었다. 하지만 우는 딸아이를 살피는 아이 엄마의 눈 속엔 으레 도사릴법한 속상함이나 짜증이 없었다. 놀란 딸을 다독이며 꼬옥 안아주던 그 엄마의 눈은 씽씽카 아들을 향하고 있었다.
“아이고, 너도 많이 놀랐겠구나. 괜찮아. 다 괜찮아.”
나를 향한 말이 아닌 줄 알면서도 순간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씽씽카 아들도 내 마음과 같았을까? 씽씽카 아들은 그 말이 끝나자마자 마음 놓고 울었다. 처음 본 아주머니의 다정한 말 한마디에 눈물로 감사를 전하는 것 같았다. 어쩔 줄 모르던 씽씽카 아빠도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아들의 어깨를 다독였다. 딸아이의 엄마는 흘러내린 안경을 바로 쓸 새도 없이 바닥에 주저앉은 채, 자신의 딸과 씽씽카 아들을 위로하기 바빴다.
어떻게 살면 그런 마음을 품을 수 있을까? 턱까지 흘러내린 안경이나 넘어진 자리의 고통보다 타인의 상한 마음을 돌볼 줄 아는 그 엄마의 넉넉한 마음이 경이로웠다. 동시에 다 큰 아이들의 투정도 견디지 못하는 내가 한없이 작게 느껴졌다. 그런 엄마와 살고 있는 여자아이가 문득 부러웠고 이내 우리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그랬구나, 괜찮아’ 한 마디면 슬그머니 사라지는 아이들의 서운함도 헤아리지 못했으니 말이다.
길을 걸으며 나는 그렇게 또 배워간다. 순두부처럼 희고 순둥순둥 한 마음으로 나를 채워간다. 쑥과 마늘만 먹으며 사람이 되길 기다렸던 곰과 호랑이처럼, 공원이란 동굴을 걸으며 나도 조금씩 사람이 되어간다. 그러니 그 시간을 사랑할 수밖에. 매일 나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