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각무침과 단호박 스프
애초에 온라인카지노 카지노 게임까지 만들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함께 집밥을 먹게될 짝꿍이 생기면서 주 1-2회 정도는 요리를 하게 되었는데, 요리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들았다. 이왕이면 그 생각들을 기록해두면 좋겠다 싶어 바로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 카지노 게임은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 아까운 나의 요리를 위한 기록정도가 되겠다.
발단은 형부가 준 노각이었다.
'형부의 갈미밭'- 한때는 최토끼님의 갈미밭이었으나 지금은 로빈슨이 상속받아 그의 남편이 농사짓고 드럼치며 여가를 즐기는- '뒤죽박죽 별장'이라 불리는 그곳에는 형부의 땀과 열정의 결실이 한창 무르익어가고 있다. 지난달에는 가지, 고추, 깻잎, 방가지씩을 원없이 뜯어다 먹었는데 오늘은 형부가 어제 수확했는데 달다며 참외와, 족히 1.5kg은 넘어보이는 노각 두개를 밭에서 바로 따 주었다.
혼자 살때는 손사래를 치며 절대 가지고 오지 않았을 노각 두개를 가지고 집으로 왔다. "노각은 싫어해"라고 엄마는 말했지만 형부가 농사지은 귀한 수확물이니 어떻게든 요리해서 잡수라고 하나 던져두고, 둘중 더 큰놈을 들고 서울로 와서 유튜브에서 마음에 드는 레시피를 하나 골라 바로 요리를 시작했다. 유튜브가 없던 시절에는 애심씨와 로빈슨 찬스를 썼겠지만 지금은 레시피가 쌔고 쌨다. 요리할때는 보통 한분보다는 두분 정도의 다른 레시피를 참고해서 나만의 방법을 절충하곤 한다.
한창 먹방볼때 구독했던 돼지형제중 동생의 유튜브 채널과 기억은 안나지만 또다른 유튜버 영상을 보고 바로 노각무침을 시작했다. 애심씨와 로빈슨이 낮에 귀에 딱지가 않도록 했던 말. 노각을 반으로 잘라서 수저로 씨를 바른뒤 얇게 써서 무치라는데로 노각을 잘라 준비해두고, 자색양파와 대파도 듬뿍 썰어두었다. 레시피에서는 쪽파를 넣으랬는데 밤 10시, 우리집에 쪽파가 있을리 없다. 미리 썰어두어 냉동보관한 대파로 대신! 맛은 큰 차이 없겠지. 대파나 쪽파나.
노각을 소금물에 절였다. 소금과 올리고당에 10분간 절이면 식감이 아삭아삭 좋아진다고했는데, 올리고당대신 알룰로스(액상)를 쓰는 터라 절이고 나서 물로 헹구게 되면 아까울것 같아 소금에만 절였는데 나중에 자세히 보니 물로 헹구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아끼지말고 레시피대로 알룰로스를 넣을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인내심도 부족해서 10분간 물을 빼야하는데 5분만에 물이 좀 나왔길래 바로 빼서 양념무치기를 시작했다.
혼자 대충 해먹을땐 몰랐는데 함께 먹을 사람이 생기니 전에 없던 "맛있게 해주고 싶은" 욕구같은게 생겼다. 로빈슨 레시피는 무조건 좋은 양념들 아끼지 말고 쓰라는게 첫번째 원칙인데, 혼자 살땐 맛있게 먹기보다 아끼는 쪽을 선택했기에 로빈슨 레시피를 무시했었다. 그러나 반복적으로 요리, 라는걸 해내가면서 로빈슨 말이 새삼 진리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아까운 한살림 깨와, 교회 사모님이 직접 짜 주신 참기름도 양껏 넣고, 동네아주머니가 직접 농사지어 말린 고추를 빻아서 만든 애심씨가 준 고춧가루도 듬뿍 넣었다. 멸치육수가 있길래 두세스푼 넣었다. 아무래도 맛이 좀 밍밍해서 간장을 넣으려다 냉장고에서 멸치액젓을 발견했다! 아뿔싸, 내가 넣으려던건 멸치액젓이었는데, 멸치육수를 넣었구만. 아무렴 어떨까. 모르는척 다시 멸치액젓을 두세방을 넣었다. 맛이 한결 진해지고 깊어진 느낌이다. 레시피에 있던 설탕대신, 소금물과 올리고당에 절여두랬는데 올리고당을 못쓴대신, 몰리짱언니 공구에서 산 그리스 아티키 꿀을 한숟가락 넣었다. 양념을 무치던 손으로 수저를 만지다가 실수로 꿀통에 고추가루를 조금 빠뜨렸다. 최악이다.
한숟가락으로는 맛에 기별도 안가는 것 같아 한번 더 넣었는데, 그래도 단맛이 없길래 한번 더 넣었다. 꿀 도합 세스푼.
자, 그럼 이제 진짜 끝. 여기저기 잘 버무리고 진공용기 바퀜통에( 내돈내산으로, 몰리짱 공구로 샀는데 녹아내리게 잘쓰고 있다) 크게 한통 예쁘게 담아두고 잠시 뿌듯함을 즐겼다. 일회용장갑을 벗고, 꺼내둔 양념들을 냉장고에 넣고 마무리하려던 찰나, 냉장고 문을 열면서 깨달았다. 뭔가 서운하다 했더니..다진마늘이 빠졌던 것. 부랴부랴 바퀜통을 열어 마늘 한큰술을 넣고, 이미 일회용장갑은 벗어 제꼈으니 급한대로 아까 꿀을 넣었던 스푼으로 뒤적뒤적 쑥쑥 찔러 넣어 요리조리 섞어보았다. 기껏 예쁘게 담은 노각과 자색양파와 대파는 여기저기 흩날렸다.
그래도 교훈을 얻었다.
기초재료 손질해서 먼저 준비해둔 다음에는 레시피에 언급된 양념 미리 일렬로 세워놓고 시작하기. 꿀뚜껑,마늘뚜껑, 깨뚜껑, 고춧가루 미리 오픈해두고 시작할 것. 그럼 깜빡하고 빼먹을리가 없을 것 같다.
어쨌거나 맛은, 내일 아이작이 먹어보고 평을 해줘야 알 것 같다. 내입맛엔 맞았는데 그에게는 좀 매울수도 있으려나. 고춧가루가 적당하다고 생각했는데 버무리고나니 생각보다 빨갰다. 많이 들어간것 같다.
(다음날 아침, 토스트에 단호박 스프를 먹고 있는 그에게 빨리 노각무침부터 먹어보라고 재촉했다. 안어울리는 메뉴지만 안달복달이 부탁대로 그는 한입 먹어보았고 역시나 조금은 맵지만 먹을 수 있을 정도라고&노각이나 이전 오이무침이나 맛은 비슷하고 맛있다고 평해주었다. 안심! 다음엔 고추가루을 한숟가락 덜 넣어야겠다)
아이작은 오뚜기 크림스프를 좋아한다. 그런 그를 위해 스프를 사다가 버섯이나 닭가슴살을 추가해서 끓여줘본적은 있지만 직접 스프를 만들어 준적은 없었다.
계기는 회사 선배인 양 전무님 덕분이었다. 몰리짱언니 공구에서 산 단호박이 너무 많아서 찜통에 찐 단호박을 출근길에 몇개 드렸더니, "제니퍼 단호박으로 스프만들면 정말 맛있는데 레시피는............"
와우! 열정적으로 설명주시는 덕분에 "전무님 저는 단호박 스프를 만들생각이 없어요"라는 말을 차마 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주말저녁 갑자기 전무님의 단호박 스프 레시피가 생각났다.
마침(;;;;;;;;;;;;;;;) 열 기운도 있다는 그를 위해 단호박 스프를 만들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전무님 레시피가 제대로 다는 기억이 나지 않아서 유뷰터 영상도 참고해서 만들었다.
먼저 양파를 올리브유에 노르노릇 하나 다 굽고, 단호박에 삶은 고구마도 넣었다. 유튜버들과 전무님은 그걸 믹서기에 갈았다는데 우리집엔 믹서기가 없어서 내가 손으로 으깼다. 머그잔으로 으깨는 사람들도 있다는데 믿을만한건 역시 내손. 곱게 갈지 않았다고 타박할 그가 아니었기에 듬성듬성 으깨서 우유를 양껏 붓고, 잘라둔 덴마크버터 한조각을 넣고, 아까 미리 볶아둔 양파를 한데 때려놓고 끓였다. 팔팔 끓이지는 않고 버터가 녹을만큼만 끓였다. 비주얼이 그럴듯했는데 맛도 있었다. 아, 소금도 조금 넣었다. 몰리짱 언니 공구에서 산 좋은 소금이었는데 이름은 생각이 안난다.
완성! 잠든 그를 깨워서 반그릇 주었더니 맛있게 먹었다. 아쉬운거 없냐고 물어보니 크리미함이 좀 부족하다고 했다. 저녁에 마트에 들렀는데 생크림이 없어서 못산 탓이다.
생크림이 추가된 단호박 스프는 아직 미지의 세계. 다음에 다시 도전해봐야겠다.
요리할때도 알았지만 요리를 복기하며 글을 쓰다보니 집에 있는 용기며, 양념이며, 재료들이 다 언니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참으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공구 열심히하세요. 화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