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담(閑中談), ‘욱’과 ‘아차’ 사이

by푸른킴
화내는 것이 오래 걸릴수록 분별력은 더욱 늘어나고
‘욱’하는 것은 ‘아차’하는 말만 늘어난다.
— 히브리인들의 잠언 14장 29절
31. 욱과 아차 사이 한중담, 잠언 14장 9절.jpg

1.

2007년에 개봉한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영화 《안경》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 보이지만, 그 고요 속에 많은 일이 들어 있는 정중동의 영화다. 고바야시 사토미와 모타이 마사코가 보여주는 표정과 침묵, 느린 걸음과 먼바다의 풍경은 이 영화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조급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가만히 보여준다.

그 영화에서 내가 좋아하는 대사 하나는 빙수 가게 주인 사쿠라가 남긴 말이다. 그는 빙수에 들어갈 좋은 팥을 만들며 이렇게 말한다.


“좋은 팥을 만드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서두르지 않는 것.”


그는 팥이 끓는 시간을 가만히 지켜본다. 너무 일찍 불을 끄지도 않고, 너무 늦게 태우지도 않는다. 끓어오르는 것을 방치하지도 않고, 조급하게 손대지도 않는다. 다만 적절한 때를 기다린다. 그리고 마침내 그때가 왔다고 생각되는 순간, 불을 끈다.


나는 그 장면을 볼 때마다 ‘서두르지 않는 것’, ‘조급해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 오래 마음에 남는다. 그것은 단순히 느리게 행동하라는 뜻이 아니다. 기다림과 판단, 인내와 결단을 동시에 품은 말이다. 무언가가 끓어오를 때,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언제나 두 가지다. 기다릴 수 있는 힘과, 행동해야 할 때를 아는 힘. 그것은 팥을 끓일 때만의 일이 아니다. 사람 안에서 감정이 끓어오를 때도 그렇다. 특히 화가 그럴 것이다.


2.

“화를 참으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라고 묻는다면, 많은 사람은 이렇게 답할 것이다. “옳은 말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어렵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사실 화를 참지 못할 만한 이유는 늘 있다. 상대가 무례했기 때문이고, 상황이 부당했기 때문이며, 내가 충분히 참고 있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더 솔직히 말하면, 그 이유를 차분히 헤아리기도 전에 이미 ‘버럭’ 소리가 먼저 나올 때가 많다. 화는 자주 생각보다 빠르고, 말은 생각보다 먼저 입 밖으로 나간다.


우리는 보통 화의 원인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화가 난 이유는 대개 상대에게 있다고 여긴다.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라는 말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내가 먼저 시작한 것이 아니고, 내가 먼저 잘못한 것도 아니며, 나는 그저 반응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화를 낸 것이 아니라, 화가 나게 만든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때로는 “나 때문에 나에게 화가 난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말조차 깊이 들여다보면, 대개는 누군가에게서 비롯된 감정을 다시 자기 안으로 돌려놓는 경우가 많다. 상대에게 화를 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을 때, 혹은 상대를 탓하기에는 마음이 불편할 때, 사람은 그 화를 자기에게 돌리기도 한다. 그러니 세상의 많은 화는 원인을 가지고 있고, 그 원인은 자주 타인에게 닿아 있다. 잠언이 묻는 것은 조금 다르다. 화가 왜 일어났는가 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 그 화가 얼마나 빨리 몸 밖으로 나오는가 하는 문제다.


3.

고대 히브리인들의 잠언에는 화에 대한 말들이 자주 등장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 말들이 단순히 인간관계의 처세술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잠언은 화를 지혜의 문제로 다룰 뿐 아니라, 때로는 신의 성품과도 연결한다.


물론 의아하게 느낄 수도 있다. 화는 너무나 보편적인 감정이다. 신앙이 있든 없든, 어느 문화에 속하든, 사람은 누구나 화를 낸다. 동서고금의 윤리와 수양의 전통에서도 화는 늘 다스려야 할 감정으로 다루어졌다. 그러므로 화를 다루는 태도를 굳이 ‘야훼의 성품’과 연결하는 것이 적절한가 하는 질문은 충분히 가능하다.


잠언의 관심은 화의 존재 자체가 아니다. 화가 있다는 사실은 부정되지 않는다. 문제는 화가 분출되는 속도다. 신이든 인간이든, 화의 원인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다. 마음의 평화가 화의 가능성까지 지워 주지는 않는다. 잔잔한 수면처럼 평화가 유지되다가도, 어느 순간 감정은 예고 없이 일어난다. 화는 그렇게 온다. 때로는 아주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오고, 때로는 오랜 침묵 끝에 마침내 말이 되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니 모든 화를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떤 화는 표현되어야 하고, 어떤 분노는 정의의 언어가 되기도 한다. 다만 잠언은 천천히 묻는다. 그 화는 너무 빨리 나온 것이 아닌가. 그 말은 너무 일찍 입 밖으로 나간 것이 아닌가. 그 행동은 조금만 더 기다렸다면 달라질 수 있지 않았는가.


4.

잠언이 직시하는 것은 ‘화를 극복하는 문제’와 ‘시간’의 관계다. 이 점에서 화는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지혜의 문제가 된다. 지혜란 감정을 억제하라는 다그침이 아니다. 지혜로운 사람도 화가 난다. 다만 그는 화가 일어나는 순간과 화가 표현되는 순간 사이에 자신을 붙잡아 그 표출의 시간을 뒤로 밀어 둘 줄 안다.


잠언의 지혜자는 이를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라고 권면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더디’이다. 히브리인들의 지혜는 화를 완전히 없애는 데 있지 않다. 화를 무작정 억누르는 데에도 있지 않다. 오히려 화가 자기 안에서 끓어오를 때, 그것을 즉시 쏟아내지 않고 잠시 묶어 둘 수 있는 능력에 있다. 화를 오래 품고 있으라는 뜻이 아니라, 화가 말과 행동이 되기 전에 그것을 판단의 시간으로 통과시키라는 뜻이다.


화가 몸 밖으로 나오려 할 때, 사람은 짧지만 결정적인 시간을 맞이한다. 그 시간 안에서 그는 물어야 한다. 이 화는 정말 정당한가. 지금 표현해야 하는가. 이 방식으로 말해도 되는가. 말하지 않고 지나가도 되는 일인가. 물론 이런 질문들이 다뤄질 만큼 여유롭지 못한 것이 바로 ‘화가 난 상황’이다. 하지만 만약 이런 질문들에 대답할 수 있다면 상황은 조금 달라질 것이다.


실제로 이런 물음들이 생략될 때, 화는 대개 ‘욱’으로 나타난다. ‘욱’은 판단보다 빠른 감정이고, 언어보다 빠른 폭발이다. 대체로 ‘아차’를 수반한다. 반면 지혜는 화를 느리게 만든다. 감정을 늦추고, 말을 늦추고, 손과 발의 반응을 늦춘다. 그렇게 벌어 둔 시간 속에서 사람은 화를 소멸시킬 수도 있고, 다른 표현으로 바꿀 수도 있으며, 때로는 더 정당하고 정확한 방식으로 말할 수도 있다.


결국 화에 있어서 지혜롭다는 것은 화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화가 몸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아는 것이다. 언제까지 묶어 두어야 하는지, 언제 풀어놓아야 하는지, 풀어놓는다면 어떤 방식이어야 하는지 아는 것이다. 다시 말해, 화에 대항하는 지혜란 결국 시간적 여유를 벌어 두는 능력이다. 말로는 그렇다. 그러나 바로 그 짧은 시간이 가장 어렵다.


5.

잠언에서 화의 문제를 다루는 이유는 단순히 인간에게 윤리적·심리적으로 유익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이 야훼의 본질적 성품과도 관계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히브리 성서에서 야훼는 자주 “노하기를 더디 하는” 분으로 고백된다. ‘더디다’는 말은 무감각하다는 뜻이 아니다. 분노할 줄 모른다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분노할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노가 곧바로 파괴적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점이 중요하다. 화의 원인은 상대에게서 올 수 있다. 불쾌함, 기분 나쁨, 배신감, 상처, 억울함, 속상함은 외부에서 밀려올 수 있다. 그러나 화를 어떻게 낼 것인가, 언제 낼 것인가, 혹은 내지 않을 것인가는 전적으로 다른 문제다. 원인과 표현은 같지 않다. 감정과 행동은 같은 것이 아니다.


야훼의 분노가 인간의 ‘욱’과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자신의 분노를 인간에게만 경솔하게 떠넘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기 안에서 무력하게 자바카라하지도 않는다. 그는 오래 기다리고, 오래 참으며, 그 사이에 자신이 할 행동을 찾는다. 때로는 용납하고, 때로는 경고하고, 때로는 돌이킬 시간을 주며, 때로는 그 대가를 스스로 짊어지는 방식으로 자신의 분노를 다룬다.


야훼의 분노는 순간의 폭발이 아니다. 그것은 오래 지연된 분노다. 오래 붙들려 있었고, 오래 통과되었으며, 오래 숙성된 분노다. 그래서 예언자들이 말한 ‘야훼의 날’은 단순히 신이 어느 날 갑자기 ‘욱’하는 날이 아니다. 오래 참아 온 시간이 더는 미룰 수 없는 심판의 언어가 되는 날이다. 고대 예언자들은 그날을 “크고 두려운 날”이라고 불렀다. 달리 표현할 말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감정의 돌발이 아니라, 오래 유예된 바카라임의 날이기 때문이다.


6.

물론 사람의 화가 언제나 신의 분노처럼 정당할 수는 없다. 오히려 우리의 화는 대개 불완전하다. 오해가 섞여 있고, 자존심이 섞여 있으며, 피곤함과 두려움과 오래된 상처가 뒤섞여 있다. 어떤 화는 정말 상대 때문에 일어나지만, 어떤 화는 내 안의 오래된 결핍이 지금의 사건을 빌려 터져 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더욱 시간이 필요하다. 화가 올라오는 순간, 사람은 자기감정을 너무 믿어서는 안 된다. 감정은 진실을 담고 있을 수 있지만, 언제나 진실 전체는 아니다. 화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신호일 수 있지만, 그 신호가 곧바로 정당한 판결이 되는 것은 아니다.


화를 가까이 두어서도 안 되지만, 멀리 보냈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화는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다루는 것이다. 그것은 불과 같다. 너무 가까이 두면 태우고, 너무 방치하면 번진다. 그러나 적절히 다루면 어둠을 밝히고, 차가운 것을 데우며, 익지 않은 것을 익게 한다.


모든 문제가 그렇듯 타이밍이다. 언제 말을 멈출 것인가. 언제 침묵할 것인가. 언제 다시 말할 것인가. 언제 사과할 것인가. 중요한 것은, 다른 것은 몰라도 화에 대해서만큼은 서두르지 않는 것이 좋다는 점이다. 누가 뭐라 해도 조급한 화는 대개 조급한 후회를 낳는다. 순간적으로 ‘욱’하고 나온 말은,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아차’ 하는 마음을 데리고 온다. ‘욱’은 빠르지만, 그 뒤처리는 길다. 말은 짧지만, 상처는 오래 남는다. 화는 천천히 드러날수록 제 기능을 발휘한다. 소멸되는 것도 한 기능이다.


이미 ‘욱’했다면, ‘아차’까지의 시간이라도 짧아야 한다. 바로 멈추고, 바로 돌아보고, 바로 사과하는 것이 그나마 지혜다. 후회가 늦어질수록 어리석음은 오래 머문다. 괜한 화를 냈다면, 그 화보다 먼저 사과가 도착해야 한다. 그래야 ‘욱’이 남긴 자리에 조금이라도 명철이 들어설 수 있다. 가장 좋은 것은 처음부터 ‘욱’과 ‘아차’가 만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좋은 팥을 만드는 데 중요한 것은 서두르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좋은 말도 그렇고, 좋은 침묵도 그렇다. 좋은 분노도 아마 그렇다. 끓어오른다고 해서 곧바로 쏟아내지 않는 것이며, 뜨겁다고 해서 곧장 입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것이다. 잠시 더 지켜보다가, 불을 끌 때와 말을 해야 할 때를 구별하는 것이다. 화가 말이 되기 전에, 그 사이에 시간을 두는 것이다. 어쩌면 지혜는 아주 거창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짧은 사이를 견디는 능력인지도 모른다. ‘욱’과 ‘아차’ 사이, 그 찰나의 틈에 사람의 명철이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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