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철학시 '글쓰기' 세 편을 하나의 철학시로 읽는 자기 비평
1. 다른 시공간에서 쓰인 세 편의 단시
나는 나의 단시를 ‘철학시’라고 부른다. 거창한 철학자의 계보를 잇겠다는 욕심은 아니다. 조금 어색할지라도 이 명명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하는 일상의 관찰을 단순한 감상에 버려두지 않기 위함이다. 감상은 순간의 정서로 끝날 수 있지만, 철학이라는 개념은 그 정서가 왜 내게 왔는지, 그것이 나의 삶을 어떤 방향으로 흔들고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다. 이처럼 내가 나의 단시에 ‘철학시’라는 이름을 붙이는 일은 시를 어려운 개념으로 장식하려는 것이 아니라, 시가 철학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다. 또한 나의 사상이 단순한 내면의 취향이나 감정의 흔적으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시이든 그 안에는 시인의 사상과 세계관이 스며 있다. 한 편의 짧은 시에도 그 사람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타인을 대하는 태도, 고통을 견디는 습관, 삶을 해석하는 윤리가 배어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철학시란 사상이 삶의 윤리를 일깨우는 실천적 개념이 되는 자리다. 그것은 생각을 아름답게 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생각이 실제 삶 속에서 어떻게 살아질 수 있는가를 나 자신에게 물으려는 치열한 시도다. 다시 말해 철학시는 사유를 관념의 방 안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그 사유가 오늘의 표정과 태도와 선택 속에서 어떻게 몸을 얻는지를 묻는 형식이다.
그래서 나의 단시는 대개 마지막 행에 개념이 집중된다. 첫 행과 둘째 행이 감각과 정서, 이미지와 사유의 흐름을 열어가는 관문이라면, 마지막 행은 그 흐름이 하나의 개념으로 응결되는 자리다. 단시의 구조에서 마지막 행은 철학을 형성하는 개념이 드러나는 지점이며, 동시에 그 개념이 실제 삶에서 실현될 수 있는 구체적인 프락시스(Praxis)로 제시되는 시의 절정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프락시스란, 시 속에서 길어 올린 개념을 다시 오늘의 삶으로 옮겨 살아보려는 실천이다. 다시 말해 마지막 행은 결론이라기보다 다시 살아갈 방향이다. 문장의 끝이 아니라, 삶으로 옮겨져야 할 작은 윤리의 시작인 것이다.
나의 단시는 적절한 단어를 찾아 배열하고 시적 형식을 빌려 일상을 기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철학의 개념으로 마무리된다. 나는 단시를 통해 순간의 감각을 붙잡고, 그 감각 안에서 삶을 견디게 하는 개념을 길어 올리려 한다. 이때 시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사유의 형식이 되고, 철학은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다시 몸을 얻는 언어가 된다. 결국 작은 기억들을 축적하여 삶으로 살아낸 사유를 담아내려는 문학적 실천, 그것이 곧 나의 프락시스다.
어젯밤, ‘글쓰기’라는 제목으로 새 철학시를 쓰다가 문득 지나온 흔적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의도한 적 없으나 거의 습관처럼 같은 제목을 달고 태어난 두 편의 시가 더 있었다. 각각 3월 9일, 3월 25일, 그리고 6월 2일. 계절의 길목마다 흩어져 있던 세 편의 ‘글쓰기’를 날짜순으로 나란히 눕혀놓고 읽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내가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사유가 형태를 갖추어 가는 은밀한 궤적이 그려져 있었다. 각각 따로 태어난 시였지만, 다시 읽는 순간 그것들은 서로를 부르고 있었다. 하나는 아직 안갯속에 있었고, 하나는 비처럼 쏟아지고 있었으며, 다른 하나는 떨림 속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1
꺼내려다 멈칫하고
사라지다 펼쳐지는―
후욱 첫 단어, 아직 마음 안개
#2
무르익은 생각, 홀연 사라지고
떠돌다 쏟아지는 지성의 비—
무딘 손, 쓱 스슥 스케치
#3
한밤중 막글 남기려 머뭇하는 데
몸안과 밖 묵은 언어 가볍게 곰비임비―
미세한 떨림 다시-되기, 되살림
이 세 편의 시는 계획된 연작이 아니다. 그러나 연속하여 읽는 순간, 하나의 단시가 온전한 철학시로 ‘만들어지는(becoming)’ 필연적인 창작의 단계가 선명히 드러난다. 처음에는 글감이 안개처럼 떠오르다 사라지고, 다음에는 사유가 비처럼 쏟아지며, 마지막에는 묵은 언어가 되살아나 하나의 철학적 개념으로 응결된다. 그러므로 이 세 편의 시는 단순히 같은 제목을 공유하는 작품들이 아니라, 나의 단시가 어떻게 감각에서 사유로, 사유에서 개념으로, 개념에서 실천으로 나아가는지를 보여주는 작은 창작의 지도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글에서 내가 말하려는 여러 개념은 서로 따로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의 위계를 이루며 나의 단시가 철학시로 나아가는 과정을 설명한다. 가장 근원에 놓인 것은 ‘검은 안식’이다. 검은 안식은 나의 단시 전체를 떠받치는 최상위 철학이며, 상실과 어둠을 억지로 지우지 않고 그 안에서 조용히 삶의 안식을 찾으려는 사유의 토대다. 그리고 이 검은 안식이 단시 안에서 움직이는 방식이 바로 ‘되어가기’다. 사물은 고정된 의미로 머물지 않고, 나의 관찰과 감각과 사유를 통과하면서 다시 다른 의미로 되어간다. 그 되어감이 실제 삶의 태도와 윤리로 옮겨질 때, 그것은 나의 프락시스가 된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사유가 발생하는 감각적 장소가 바로 ‘작은 것들의 문전’이다. 꽃잎, 먼지, 바람, 잔소리, 길, 숲의 이슬 같은 작은 것들의 문전에서 나는 멈추고, 듣고, 사유하며, 마침내 나의 철학을 길어 올린다.
그러므로 나의 단시는 검은 안식을 향해 나아가되, 그것을 곧바로 추상적 명제로 말하지 않는다. 작은 것들의 문전에서 시작하여, 사물이 다시 되어가는 과정을 감각하고, 그 감각을 삶의 윤리로 옮기는 방식으로 철학에 도달한다. 검은 안식은 나의 단시가 향하는 깊은 밤이고, 되어가기는 그 밤 속에서 사물이 움직이는 방식이며, 프락시스는 그 움직임을 삶으로 살아내려는 태도다. 작은 것들의 문전은 이 모든 일이 처음 시작되는 낮고 고요한 자리다.
2. 세 편의 글, 그 자체가 하나의 단시
개별적으로 존재하던 세 편의 단시는 연속하여 읽는 순간 하나의 시처럼 재구성된다. 마치 단시 한 편의 구조를 거대하게 확장해 둔 형식과 같다. #1은 시의 상황과 배경이 되는 첫 번째 행으로, #2는 그 상황에 대한 나의 해석과 전개가 담긴 두 번째 행으로, #3은 앞선 배경과 해석을 종합하여 철학 개념이 형성되는 세 번째 행이자 결론으로 대응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세 편의 시는 각각 독립된 작품이면서도 동시에 하나의 단시를 이루는 세 개의 행이 된다. #1은 아직 말이 되지 못한 사유의 기척이다. #2는 그 기척이 감각과 손의 운동을 통과하며 형태를 얻는 과정이다. #3은 그 형태가 다시 삶의 개념으로 응결되어 ‘되살림’이라는 윤리적 방향을 얻는 순간이다. 그러므로 세 편의 시를 하나로 읽는 일은 단순한 배열이 아니라, 나의 글쓰기가 실제로 어떤 내적 공정을 거쳐 철학시가 되는지를 확인하는 일이다.
우연히 마주한 이 세 편의 시는 각각 최종 탈고 전, 나의 사유가 언어라는 옷을 입고 고유한 글쓰기 공정을 거치는 과정을 보여준다. 사유의 흐름은 안개에서 비로, 비에서 떨림으로, 떨림에서 마침내 되살림으로 나아간다. 이 역동적인 여정 동안 나의 글쓰기는 감상에서 사유로, 사유에서 개념으로, 그리고 개념에서 프락시스로 조금씩 자리를 옮겨가고 있었다. 이제 이 세 편의 글을 결합하여 나의 글쓰기가 어떻게 ‘되어가기(Becoming)’의 철학을 구현해 내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려 한다.
3. 셋이면서 하나인 단시의 철학적 여정
3.1. 시의 상황과 배경: 혼돈과 모호함 속에서 뱉어낸 첫 숨
첫 번째 시(#1)는 마지막 행인 “후욱 첫 단어, 아직 마음 안개”에 시의 철학이 담겨 있다. 글쓰기란 단순히 적절한 글감을 찾는 행위로 끝나지 않는다. 발견한 글감을 어떻게 언어화할 것인가에 대한 지난한 과정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나는 이 웅성거리는 서막을 “꺼내려다 멈칫하고 / 사라지다 펼쳐지는”이라는 묘사로 포착했다.
겨울의 차가운 공기가 채 사라지지 않은 3월 초순, 글쓰기는 아직 형체를 갖추지 못한 혼돈 상태다. 내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려 하지만 이내 망설임으로 멈칫하고, 사유는 사라짐과 펼쳐짐을 끈질기게 반복한다. 이때의 글감은 아직 문장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마음속에 잠깐 나타났다가 다시 흐려지는 기미에 가깝다. 잡으려 하면 사라지고, 포기하려 하면 다시 펼쳐지는 이상한 움직임. 글쓰기의 첫 순간은 늘 이처럼 불확실한 왕복운동 속에서 시작된다.
나는 창작의 첫 단계가 이토록 고단하다는 것을 ‘후욱’이라는 한숨 섞인 부사어와 시행을 두 단어씩 밀어 넣는 호흡에 담아냈다. ‘꺼내려다’, ‘멈칫하고’, ‘사라지다’, ‘펼쳐지는’이라는 움직임들은 모두 완성보다 지연에 가깝다. 아직 무언가 도착하지 않았고, 아직 말이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특히 ‘마음 안개’라는 시어는 나의 단시가 ‘희미함’과 ‘모호함’을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사실을 함의한다. 철학시로 전진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사유의 불안과 설렘을 감각적으로 포착하는 이 안개의 단계를 거쳐야만 한다.
따라서 #1은 단순히 글을 쓰기 전의 답답함을 말하는 시가 아니다. 이 시는 모든 철학적 사유가 처음에는 선명한 명제가 아니라 흐릿한 감각으로 찾아온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철학은 처음부터 완성된 개념으로 오지 않는다. 그것은 먼저 안개처럼 마음에 번지고, 한숨처럼 몸 밖으로 새어 나오며, 마침내 첫 단어라는 작은 숨을 얻는다. 이 첫 숨이 없으면 이후의 비도, 떨림도, 되살림도 가능하지 않다. 그러므로 #1은 세 편의 시 가운데 가장 희미하지만, 동시에 모든 과정을 여는 근원적 장면이다.
3.2. 시의 전개: 쏟아지는 사유의 정돈과 기록
그로부터 보름 뒤에 쓰인 두 번째 시(#2)의 핵심은 마지막 시행인 “무딘 손, 쓱 스슥 스케치”에 있다. 이는 안갯속을 헤매던 글감이 비로소 밖으로 출현하는 구체적인 창작의 장면이다. 비록 이때의 언어는 완성된 그림이 아닌 거친 ‘스케치’에 불과하지만, 글쓰기에서는 가장 의미 있는 도약이다. 날것의 초안이야말로 모든 사유가 형태를 얻는 첫 번째 육체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사유가 언어로 탄생하는 순간은 결코 순탄하지 않다. “무르익은 생각, 홀연 사라지고 / 떠돌다”의 과정을 거듭하기 때문이다. 충분히 익었다고 믿었던 생각도 막상 적으려 하면 순식간에 사라진다. 머릿속에서는 분명했으나 문장 앞에서는 하얗게 흩어진다. 사유는 붙잡히기 전까지 늘 떠돈다. 글을 쓰는 사람은 그 떠도는 것을 붙잡기 위해 기다리고, 망설이고, 다시 손을 움직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막혀 있던 문장들이 임계점을 넘어 지성의 비가 되어 세차게 “쏟아지는” 경험을 한다. 이때 글쓰기는 조용한 정리가 아니라 갑작스러운 분출에 가깝다.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정연한 논리는 이 격정의 순간에 홀연히 사라지기도 한다. 오히려 너무 많은 논리가 글을 막고, 무딘 손의 움직임이 글을 열어젖힐 때가 있다. 나의 단시가 이성적인 노동을 넘어 쏟아지는 영감을 온몸으로 맞아내는 감각적 행위가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쏟아지는 비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머리로 계산하기보다 ‘무딘 손’으로 ‘쓱 스슥’ 화면을 긁어내리는 직관적인 용기가 필요하다. 여기서 ‘무딘 손’은 부족함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실천의 상징이다. 손은 완벽하지 않지만 움직인다. 손은 모든 개념을 미리 이해하지 못했어도 먼저 써 내려간다. 이 거친 움직임 속에서 사유는 더 이상 내면에 머물지 않고 외부의 표면 위에 흔적을 남긴다. 비를 맞으며 언어를 선택하고 배열하는 치열한 움직임을 통해, 단시는 논리적 귀결이 아니라 감성이 주도하는 몸의 현상으로 구체화된다.
그러므로 #2는 글쓰기의 중간 단계, 곧 사유가 언어의 표면으로 처음 육화되는 순간을 보여준다. 안갯속에서 숨처럼 시작된 첫 단어는 이제 비가 되어 쏟아지고, 그 비를 맞은 손은 불완전한 스케치를 남긴다. 완성은 아직 멀다. 그러나 이 불완전한 스케치가 없다면 사유는 결코 세계에 도착하지 못한다. #2는 바로 그 도착의 첫 흔적이다.
3.3. 철학적 개념에 도달: 숙성을 거쳐 도달한 평온과 본질의 세계
두 달의 시간이 흐른 뒤 작성된 세 번째 시(#3)는 단시의 철학이 실제 어떤 삶의 행동으로 구현되는가에 주목한다. 마지막 단어인 “되살림”이 바로 그 실천의 흔적이다.
완연한 초여름으로 접어든 6월 초의 한밤중, 하루 동안 침전된 사유를 글로 남기려 투박한 ‘막글’의 운을 떼며 잠깐 머뭇거린다. 그러나 이 멈춤은 3월의 망설임과는 다르다. 3월의 머뭇거림이 아직 형체를 갖추지 못한 안개의 불안이었다면, 6월의 머뭇거림은 이미 충분히 숙성된 언어가 제때를 기다리는 고요에 가깝다. 이 시에서 글쓰기는 더 이상 무언가를 억지로 끌어내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오래 묵은 언어가 스스로 흘러나오도록 몸의 문을 열어주는 일에 가깝다.
내면에서 묵직하게 숙성 과정을 거친 언어들은 이제 무겁지 않고 “몸안과 밖 묵은 언어 가볍게 곰비임비” 스스로 밀려 나온다. ‘곰비임비’라는 말은 이 장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언어가 한꺼번에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잇따라, 차례로, 그러나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감각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2의 비가 격정적인 분출이었다면, #3의 곰비임비는 숙성된 흐름이다. 거기에는 조급함보다 평온함이 있고, 밀어붙임보다 스스로 열리는 리듬이 있다.
거칠게 화면을 긁어내리던 스케치 손길은 존재 전체를 울리는 ‘미세한 떨림’으로 승화되고, 글쓰기는 마침내 나를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다시-되기, 되살림”의 자리에 도달한다. 여기서 ‘미세한 떨림’은 단순한 감정의 진동이 아니다. 그것은 글이 내 안의 묵은 언어를 깨우고, 멈춰 있던 사유를 다시 움직이게 만들 때 생겨나는 존재의 반응이다. 글을 쓰는 순간, 나는 이전의 나로 남아 있지 않다. 언어를 통과하면서 조금 달라지고, 조금 새로워지고, 조금 다시 살아난다.
여기서 나의 철학을 함축하는 시어는 단연 ‘다시-되기’이다. 철학시란 내 앞의 세계와 언어, 그리고 나 자신이 사유를 거쳐 끊임없이 새로운 존재로 변화하는 과정과 연관된다. 시는 그 ‘되어가기’의 역동을 문학의 언어로 해체하고 재현하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고정되어 있던 기존의 사물과 관념은 분해되고, 끝내 나에게 가장 적절한 언어로 결합하며 본질을 되찾는다.
따라서 #3은 단순한 완성의 단계가 아니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되는 자리다. 시가 완성되었다는 것은 문장이 마감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 문장이 삶으로 되돌아갈 준비를 마쳤다는 뜻이다. ‘되살림’은 바로 이 지점에서 프락시스가 된다. 쓴다는 것은 나를 표현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를 다시 살리는 일이다. 묵은 언어를 되살리고, 굳어진 생각을 되살리고, 사라진 감각을 되살리는 일. 이 되살림의 과정 속에서 단시는 마침내 철학시가 된다.
3.4. 되어가기의 철학적 프락시스
이 세 편의 시를 하나로 이어 읽을 때, 우리에게 최종적으로 남는 철학적 개념은 바로 ‘되어가기(Becoming)’ 다. 세 편의 글 사이에는 삼 개월이라는 물리적 시간이 고여 있다. 미처 의식하지 못했으나, 그 기간 동안 나의 삶은 수많은 순간으로 미분되었다가 다시 시적 언어라는 온전한 궤적으로 적분 되면서 나선형으로 전진해 왔던 것이다.
안개와 같은 혼돈의 시간을 거쳐, 비처럼 사유가 내리고, 끝내 떨림 속에서 되살림의 윤리에 다다르는 과정. 이 흐름은 단순한 시간의 순서가 아니다. 그것은 글쓰기가 내 안에서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흔들리고, 어떻게 하나의 개념으로 몸을 얻는지를 보여주는 내적 운동이다. #1의 안개는 가능성의 상태이고, #2의 비는 분출과 기록의 상태이며, #3의 되살림은 개념과 실천의 상태다. 이 세 상태가 이어질 때, 단시는 하나의 철학적 생성을 경험한다.
‘되어가기’는 멈추지 않는 변화를 전제한다. 나의 단시 속에서 관찰된 일상들은 내 안에서 화석처럼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과정과 사유의 반복을 통해 숨겨져 있던 본연의 실체로 계속해서 ‘다시 되어가는’ 중이다. 이때 시인은 단순히 세계를 묘사하는 사람이 아니다. 시인은 세계를 다시 읽고, 다시 느끼고, 다시 말함으로써 그 세계가 다른 의미로 태어나게 하는 사람이다. 하나의 사물은 시 속에서 사유를 통과하고, 하나의 감정은 개념을 통과하며, 하나의 기억은 윤리를 통과한다. 그렇게 시는 세계를 다시 되게 하고, 동시에 시인을 다시 되게 한다.
결국 이 세 편의 시를 관통하는 ‘되살림’이라는 개념이야말로 내가 글쓰기를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문학적이자 철학적인 프락시스(Praxis)이다. 나의 단시는 내 앞에 일어나는 작은 사건, 일상의 관찰로부터 파생된 순간의 감상을 붙잡는 것에서 시작하지만, 그저 감상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을 안갯속에서 견디고, 비 속에서 적어내고, 떨림 속에서 되살려 하나의 삶의 방향으로 옮겨간다. 그러므로 나에게 단시를 쓰는 일은 문장을 만드는 일이면서 동시에 나 자신의 사유가 갱신되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단시는 나의 철학시가 된다. 감각이 사유가 되고, 사유가 개념이 되며, 개념이 다시 삶으로 돌아오는 순환 속에서, 나는 조금씩 다른 나로 ‘되어간다.’
4. 작은 것들의 문전에서 피어나는 나의 철학
4.1. 작은 철학시라는 이름
나의 철학시에서 다루는 개념의 위계에서 ‘작은 것들의 문전’은 나의 철학이 처음 발생하는 감각적 장소다. 검은 안식이 나의 단시 전체를 떠받치는 최상위 철학이라면, 작은 것들의 문전은 그 철학이 처음 숨을 얻는 자리다. 나는 거대한 개념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팝나무 꽃잎, 봄바람의 두드림, 옛 앨범의 먼지, 사라진 부모님의 잔소리, 길 위에서 느낀 답답함, 서재 밖 숲의 이슬과 냄새 같은 사소한 것들 앞에 먼저 선다. 그 작은 것들은 처음부터 철학의 이름으로 오지 않는다. 그것들은 다만 내 앞에서 흔들리고, 스치고, 사라지고, 냄새나고, 소리를 낸다. 나는 그 문전에서 잠시 멈추어 그것들이 내 삶을 어떤 방향으로 흔드는지 듣는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나의 단시는 ‘작은 철학시’다. 그것은 내가 나만의 철학을 지향한다는 뜻이다. 궁극적으로 나의 철학은 ‘검은 안식의 철학’이라는 큰 범주 안에서 정의된다. 그러므로 나의 단시가 말하는 ‘작다’는 말은, 거시적인 검은 안식의 철학을 향해 나아가는 미시적인 사유의 단위라는 뜻을 품고 있다. 작은 감각과 짧은 사유가 하나씩 쌓여갈 때, 그것들은 마침내 검은 안식이라는 더 큰 물줄기에 합류한다.
그런 점에서 ‘작다’는 말은 단순한 자기 겸손의 용어가 아니다. 그것은 거대한 세계를 아주 작은 감각의 입자 안에 접어 넣으려는 문학적 형식의 정의에 가깝다. 작은 철학시는 삶을 미분하여 포착한 생각을 짧은 형식 안에 담아내는 시다. 삶의 거대한 질서는 나의 바깥, 닿지 않는 먼 곳의 추상적 담론에서만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은 내 눈에 포착되는 창밖의 꽃잎 하나, 내 몸이 감촉하는 느린 바람, 계절을 따라 달라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는 감상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
나에게 철학은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명령이 아니라, 낮은 곳에서 천천히 피어나는 숨결이다. 이를 위해 나는 자주 내 몸이 만나는 다양한 삶의 경계에서 잠시 멈춘다. 그 문전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리를 듣는다. 요컨대 나의 단시는 단순한 짧은 감상시가 아니다. 생활의 가장 낮은 문턱에서 언어를 조립하고, 그 언어를 통해 작은 철학을 일깨워보려는 수행적 태도다.
4.2. 경계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윤리
나의 단시는 인간이 어떻게 시간, 기억, 상실, 변화, 몸, 자연과 관계 맺는지를 나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내가 바라본 봄과 여름은 어떤 계절인지를 스스로 묻는다. 그것은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다. 봄은 물러나야 할 존재이고, 여름은 시작되어야 할 존재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두 계절을 서로 밀어내는 적대적 존재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 이어지는 절기로 본다. 봄은 여름을 막지 않고, 여름은 봄을 짓밟지 않는다. 변화는 전쟁이 아니라 인계이며, 단절이 아니라 비켜섬이다.
나는 단시를 쓰면서 인간 삶이 보편적으로 넘어서야 할 문턱을 관찰하는 법을 배운다. 유년에서 청년으로, 사랑에서 이별로, 상실에서 회복으로, 한 생애의 계절은 언제나 각자의 경계에서 서로를 바라본다. 나는 바로 그 경계에 직면한 순간을 붙잡고 싶었다. 아직 떠나지 않은 것과 아직 오지 않은 것이 함께 서 있는 자리, 그 애틋하고도 고요한 문전이 나의 시적 관심이다.
그런 점에서 ‘문전’은 나의 단시에서 중요한 철학적 장소다. 문전은 안도 아니고 완전한 밖도 아니다. 끝도 아니고 완전한 시작도 아니다. 떠난 것도 아니고 완전히 돌아온 것도 아니다. 아직 떠나지 않았으나 이미 멀어지고 있고, 아직 오지 않았으나 이미 가까워지고 있는 자리다. 나는 바로 이 미묘한 이행의 자리에서 철학이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사유의 균형이 조금 기울어질 때, 그 기울어진 틈에서 새로운 의미가 열린다.
이때 변화는 철학적 의미에서 단절이 아니라 이행이다. 관계성의 측면에서 존재는 홀로 열리지 않는다. 존재는 관계 속에서 서로를 향해 열린다. 모든 글쓰기는 순수한 무에서 갑자기 생겨나지 않는다. 그것은 이전 시간의 잔광, 이전 존재의 물러남, 이전 사랑의 흔적, 그리고 지금 나의 관찰과 경험이 어우러질 때 비로소 깨어난다. 나의 단시는 바로 이 깨어남의 문턱을 붙잡으려 한다.
4.3. 상실을 견디는 작은 부활
예를 들어 「슬픈 부활」이라는 시에서 나는 부모님의 잔소리를 회상하며 소환한다. 이제 그 소리는 더는 현실의 음성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옛 앨범의 먼지를 털어내는 “툭툭”의 감각 속에서, “자박자박” 걸어오는 기억의 발소리 속에서 언제나 다시 재생된다. 슬픈 부활은 다시는 만날 수 없어서 슬프지만, 기억과 기록 속에서 다시 소생된다는 점에서 부활이다. 잃어버린 것을 기억 속에서 찾고, 그것을 다시 듣는 방식으로, 다시 개념화하는 방식으로 재현한다.
그러나 사라진 것은 돌아오더라도 결코 예전의 현실로 돌아오지는 않는다. 나는 잃어버린 것을 완전히 되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부활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상실을 견디는 방식에 대한 나의 인문학적 성찰이다. 사라진 것은 기억의 형태로, 흔적의 형태로, 다음 삶을 깨우는 잔광으로 남는다.
나의 단시는 인간을 승리의 존재로 과장하지 않고, 상실을 견디는 존재로 조용히 세우고자 한다. 내가 추구하는 위로는 값싼 위안이 아니라, 사라진 것을 사라진 것으로 인정한 뒤에야 가능한 검은빛의 위로다. 글쓰기는 바로 이런 과정을 삶의 언어로 현현하는 일이다. 사라진 것을 억지로 되찾는 것이 아니라, 사라진 것이 남긴 잔향을 오래 듣는 일. 그 잔향 속에서 다시 살아갈 아주 작은 힘을 얻는 일. 그것이 나에게는 슬픈 부활이며, 동시에 검은 안식으로 나아가는 첫 문턱이다.
4.4. 느림과 감각의 공공성
한편 나의 단시는 개인의 문제를 넘어, 슬롯 안에서 일어나는 삶의 현상에도 주목한다. 특히 내가 주목하는 것은 슬롯가 구현하는 속도다. 현대 슬롯가 요구하는 빠름과 느림, 높은 가성비와 낮은 효율성, 소유와 경쟁의 질서를 냉정하게 관찰한다. 오늘의 슬롯는 빠르게 이동하고, 빠르게 판단하고, 빠르게 대체한다. 하나가 끝나면 곧바로 다음 것이 들어서야 하며, 낡은 것은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밀려난다.
물론 변화는 모든 사물이 겪는 운명 같은 현상이다. 변화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다만 그 변화를 어떤 속도로 받아들이고, 어떤 방식으로 조율할 것인지는 중요하다. 내가 바라는 변화는 오래된 것을 빠르게 폐기하는 변화가 아니다. 오래된 것이 남긴 자리를 가볍게 밀어주며, 그 위에 새로운 세계를 조심스럽게 덧입히는 변화다. 빠른 변화를 추구하기보다, 가능하다면 느릿한 변화로 삶의 리듬을 조율하는 일이다.
나의 단시가 슬롯학적으로 지니는 의미는 바로 이 ‘느림’에 있다. 나의 단시가 철학으로 전진하는 것은 ‘느림의 미학’을 유지하려는 태도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느림은 단순히 속도가 낮은 상태가 아니다. 느림은 타자를 알아볼 시공간의 여백을 남겨두는 환대의 윤리 중 하나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슬롯 또한 그렇게 변화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세대가 세대를 빠르게 밀어내고, 제도가 인간을 급하고 강하게 압박하고, 새로운 것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옛 상품을 밀어내는 방식을 경계한다. 그런 방식으로만 변화한다면, 슬롯는 발전하면서도 늘 피로하고, 편리한 제품은 늘어나면서도 삶의 표면은 점점 거칠어진다. 나의 단시에서 추구하는 철학은 바로 이 변화에 대한 자기 성찰이다. 변화란 시간을 빼앗는 일이 아니라, 삶의 시간을 천천히 주고받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답.답 한가」에 나타나는 길의 경험도 슬롯학적으로 중요하다.
답.답 한가 答答閑歌
차선 어긋나 갈팡올팡
여기가 거기같은 골목 둘러둘러, 사이
늦었다 싶었을 때 결국 제 길로ㅡ
이 단시에서 나는 길을 잘못 들었을 때의 답답함을 조금 해학적으로 풀어냈다. 잘못 든 길은 은유적으로 개인의 사소한 불편을 넘어, 슬롯적 질서와 개인의 몸이 충돌하는 순간을 드러낸다. 일방통행, 차선, 표지판, 규칙은 슬롯를 가능하게 하는 질서다. 그러나 그 질서 앞에서 몸은 때로 당황하고, 막히고, 돌아간다. 나는 그 작은 불편을 단순한 해프닝으로 흘려보내지 않고, 몸이 슬롯적 구조와 만나는 지점으로 읽어내고자 했다. 결국 길 위의 답답함은 단순한 길 찾기의 실패가 아니라, 인간이 질서 속에서 자기 방향을 다시 찾아가는 작은 슬롯학적 장면이 된다.
또한 나는 글쓰기의 끝에는 숲을 걸었던 경험을 되살리거나, 직접 숲으로 나가는 산바카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글은 서재에서만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재는 개인의 지식과 문자가 축적된 공간이지만, 숲이라는 또 다른 서재는 생명들이 서로 얽히고 상호 교류하며 움직이는 공공의 장소다. 이때 나의 단시 쓰기는 숲을 걸으면서 비로소 완성된다. 글쓰기가 고립된 정신의 작업이 아니라, 몸이 타자적 세계 속으로 이동하며 다시 감각을 회복하는 과정임을 숲은 일깨워준다. 이렇게 나는 나의 단시를 통해 슬롯적 관점에서 삶의 관계를 상호 회복이라는 틀로 이해하려 하며, 그 과정에서 감각의 공공성을 생각한다.
4.5. 소리, 압축, 그리고 감각의 형식
끝으로 나의 단시라는 글쓰기는 문학의 형식을 자발적으로 변형함으로써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려는 노력이다. 나의 단시에서 나는 압축, 반복, 의성어와 의태어로 감각의 서사를 만들려고 시도한다. 문학적으로 나의 단시는 짧은 형식 안에 감각과 사유를 동시에 압축하려 한다. 나는 세 행, 마흔 자 안팎의 짧은 형식을 지향하면서, 부사어·의성어·의태어·조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이 형식은 하이쿠적 절제미를 떠올리게 하지만, 나는 단순히 순간의 정취만을 붙잡으려 하지 않는다. 나는 순간의 감각을 철학적 관계성으로 확장하려 한다.
특히 이 관계성은 ‘소리’를 통해 극대화된다. 짧은 시 안에서 소리는 장면을 열고, 장면은 사유를 부른다. 소리에는 발생시키는 것이 있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몸이 있다. 나는 듣고, 보고, 감촉한 뒤에 그것을 충분히 번역하고, 마지막 행에서 그 해석의 결과를 하나의 개념으로 내놓는다. 이러한 사유 과정의 전진은 나의 단시가 지향하는 중요한 문학적 방식이다. 나는 철학이 딱딱한 용어와 문장으로 굳지 않도록, 의성어와 의태어를 통해 추상적 사유를 감각의 몸으로 되돌려놓으려 한다. 철학은 소리 속에서 숨 쉬고, 개념은 꽃잎처럼 흩날릴 때 비로소 시가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의 단시는 필연적으로 철학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때의 철학은 외부에서 시 위에 덧씌워지는 관념이 아니다. 그것은 소리와 장면과 몸의 반응 속에서 천천히 피어나는 사유다. 작은 소리가 장면을 열고, 장면이 감각을 부르며, 감각이 마침내 하나의 개념으로 응결될 때, 단시는 비로소 자기만의 철학을 갖게 된다.
4.6. 검은 안식의 철학
‘검은 안식의 철학’은 이런 사유 과정에서 흔들리지 않는 나의 토대다. 이 개념에서 ‘검은 안식’은 단순한 어둠 속 휴식이나 암흑 속 정지가 아니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누리는 안식이다. 사라진 것을 억지로 슬퍼하지 않고, 절망을 억지로 극복하려 하지 않으며, 어둠을 빛으로 바꾸려고 무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어둠 안에서 자기 삶을 조용히 안식하는 태도다.
이것이 내가 검은 안식의 철학에서 추구하는, 소유하지 않음을 소유하는 윤리다. 사랑했던 것을 다시 내 것으로 만들려 하지 않고, 그것이 남긴 잔향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나는 나의 단시를 통해 바로 이 ‘어둠 속 안식’을 삶의 지혜로 사유하려 한다. 상실한 것을 다시 붙잡으려는 욕망을 멈추고, 사라진 것이 사라진 채로 나를 비추도록 허락하는 일. 그것이 나에게는 검은 안식이며, 나의 단시는 바로 그 검은 안식 위에 놓여 있다.
다시 말해 이 철학은 상실의 철학이면서 동시에 생성의 철학이다. 끝은 단순한 소멸이 아니다. 끝은 다음 시작을 깨우는 방식으로 남는다. 모든 끝은 다음 존재를 향해 자신을 건너가게 하는 경계다. 그러므로 나의 철학은 비극적이되 절망적이지 않다. 나는 어둠을 인정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 아주 작은 빛의 결을 찾아내고자 한다. 존재는 혼자 완성되지 않는다. 봄은 여름을 깨우고, 과거는 현재를 찌르며, 기억은 상실을 다시 말하게 하고, 숲은 서재의 문장을 완성시킨다. 모든 존재는 다른 존재의 문 앞에서 자신을 알아차린다. 나는 이 관계의 구조를 아주 짧은 형식으로 붙잡고자 한다.
4.7. 작은 것의 아름다움과 미미학
이 모든 논의를 종합하면, 결국 나의 단시는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문학적 형식이다. 아름다움은 반드시 화려하거나 숭엄한 사유에서 오지 않는다. 오히려 떨어지는 꽃잎, 앨범 위의 먼지, 길 위의 답답함, 숲의 이슬처럼 쉽게 지나쳐버릴 수 있는 것들에서 나온다. 나는 사소한 것 안에 세계의 깊은 결이 숨어 있다고 믿는다.
이처럼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주목하는 미미학(微美學)은 경미(輕味)의 아름다움과 닿아 있다. 가볍지만 얕지 않고, 소박하지만 빈곤하지 않은 아름다움이다. 나는 무겁고 거창한 언어로 삶을 압도하기보다, 작은 말 하나가 오래 울리게 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나아가 여백 역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채워지지 않은 단어와 단어 사이에서 해석의 여지가 생겨난다. 그런 점에서 나의 단시에서 셋째 행의 윤리는 결론의 철학이 아니라 시작의 철학이다. 철학은 결론이 아니다. 삶으로 나아가는 윤리의 시작이며, 프락시스의 출발이다.
결론적으로 나의 단시는 작은 형식 안에 나의 철학을 형체화하려는 문학적 시도다. 사소한 일상을 사유의 사건으로 바꾸는 것이다. 관념을 생활화하고, 생활을 다시 철학화한다. 나의 철학시는 철학자들의 고상한 개념을 단순히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견해만을 높은 곳에 두지도 않는다. 오히려 나의 언어로 만들어낸 나의 철학이 그들의 언어와 같은 결을 가질 수 있다는 확신으로, 나는 서재의 창문 너머에서, 숲길 안에서, 앨범의 한 장 사진 속에서, 숲의 이슬 곁에서 철학을 찾아낸다.
내가 나의 단시에서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분명하다. 변화는 고상한 언어를 받아들이는 데서도 발생할 수 있지만, 그와 동시에 작은 발견에서도 가능하다. 나의 단시는 바로 그 작은 사유의 단서를 찾아내는 철학적 지혜의 추구다. 작은 것들의 문전에서, 나는 오늘도 나의 철학이 천천히 피어나는 소리를 듣는다.
5. 철학시로서 나의 단시가 지닌 한계
나의 단시가 지닌 한계도 분명하다. 첫째, 「글쓰기」 연작에서도 드러났듯이, 사유를 반영하는 언어가 때로는 내 삶의 바닥에 단단히 정초 하지 못하고 부유할 때가 있다. 무엇보다 개념의 밀도가 나도 모르게 높아져, 시의 자연스러운 호흡을 압박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 예를 들어 ‘검은 안식’, ‘헤벨’, ‘지금-시간’, ‘존재론적 우편함’, ‘예언자적 상상력’ 같은 개념들은 나의 시를 깊게 읽을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지나치게 전면에 나올 경우, 풍경보다 개념이 앞서는 위험을 배제할 수 없다. 개념이 의미를 너무 빨리 확정해 버리면, 단시 특유의 여백과 암시성은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
둘째, 나의 단시는 짧은 형식 안에 큰 사유를 담으려 하기 때문에, 때로는 시 자체보다 해설이 더 무겁게 다가올 때가 있다. 단시가 본래 말하지 않은 것에서 힘을 얻는 형식이라면, 내가 시를 설명하려는 욕망에 지나치게 이끌리는 것은 분명한 한계다. 설명이 많아질수록 독자가 스스로 머물고 해석할 수 있는 침묵의 자리는 좁아진다. 단시의 아름다움은 여백에서 온다. 명료한 단어뿐 아니라, 말해지지 않은 그늘 속에서도 의미는 조용히 창발 한다.
셋째, 반복되는 사유 구조도 앞으로 경계해야 할 지점이다. 상실, 비움, 인계, 부활, 안식이라는 주제는 나의 시 세계를 이루는 중요한 중심이다. 그러나 이 구조가 작품마다 유사하게 반복될 경우, 개별 단시의 독립성은 약해질 수 있다. 모든 사물이 결국 같은 철학적 결론으로 수렴한다면, 각각의 사물이 지닌 고유한 낯섦과 생생함은 희미해진다. 꽃잎은 꽃잎의 방식으로, 먼지는 먼지의 방식으로, 길은 길의 방식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철학은 그 사물들의 고유한 숨을 지운 뒤에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숨결을 끝까지 따라간 뒤에 조용히 도착해야 한다.
넷째, 문학적으로도 나는 더 많은 ‘문장의 절제’를 스스로 익혀야 한다. 감각어와 조어는 나의 단시가 지닌 중요한 힘이다. 그러나 그 의도성이 지나치게 드러나면 자연스러운 울림보다 작위적인 효과가 앞설 수 있다. 지나치게 미학적인 언어를 구사하려고 할수록, 여백과 설명 사이의 균형은 쉽게 깨진다. 나는 시를 깊이 이해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함축된 시어를 길게 풀어내곤 하지만, 때로는 시가 스스로 어둠 속에 머물도록 두는 일도 필요하다.
나의 단시는 인위적으로 더 높은 완성에 도달하려 하기보다, 시어 자체가 스스로 자기 철학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철학은 때로 만들어진 사유이지만, 시는 만들어지기 전에 먼저 숨 쉬어야 한다. 그러므로 나의 역할은 시어 위에 개념을 얹는 것이 아니라, 시어가 자기 안에서 개념을 피워낼 수 있도록 조율하는 일이어야 한다. 시어 자체가 먼저 숨 쉬게 해야 한다. 시가 먼저 걷고, 철학은 그 뒤를 조용히 따라와야 한다.
6. 결론: 글쓰기의 끝에는 자기 발생적인 철학이 살아난다
나의 단시가 끝내 도달하는 자리는 철학이다. 그러나 그 철학은 시 바깥에서 억지로 가져온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사물들의 경계에서 피어나는 사유의 꽃이다. 나의 단시는 작은 것을 모아 점점 확장되는 사유의 운동이다. 그렇다고 해서 큰 개념을 말하기 위해 작은 것들을 잠시 빌려 쓰고 버리는 것은 아니다. 꽃잎은 끝까지 꽃잎이어야 하고, 먼지는 끝까지 먼지여야 하며, 바람은 끝까지 바람이어야 한다. 그 작은 사물들이 자기 몸을 잃지 않을 때, 비로소 그 안에서 철학이 조용히 열린다.
나의 단시는 작지만 작지 않다. 짧지만 가볍지 않다. 그것은 삶의 거대한 의미를 웅변하지 않고, 다만 작은 소리로 문을 두드린다. “똑똑똑.”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다시 알게 된다. 시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삶의 문전에서 철학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이 철학에서 끝은 사라지는 벽이 아니다. 끝은 다음 시작이 조용히 눈뜨는 문턱이다. 검은 안식의 철학이 나의 단시에서 반복되고 변주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라진 것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고, 남겨진 것은 그대로 멈춰 있지 않으며, 끝난 것은 다른 방식으로 다시 시작된다. 나의 단시는 바로 그 미세한 전환의 순간을 붙잡으려 한다. 작은 사물의 문전에서, 상실과 생성이 서로의 손을 조용히 건네는 순간을.
이제 나의 단시를 이루는 개념들의 자리는 조금 더 분명해진다. 검은 안식은 나의 단시가 끝내 돌아가고자 하는 철학적 토대다. 되어가기는 그 검은 안식이 사물과 기억과 언어 안에서 움직이는 방식이다. 프락시스는 그 되어감을 다시 삶의 윤리로 옮겨 살아보려는 실천이다. 그리고 작은 것들의 문전은 이 모든 과정이 처음 감각으로 피어나는 자리다. 그러므로 나의 단시는 작은 것에서 시작하지만, 작은 것에 갇히지 않는다. 작은 것들의 문전에서 사유는 깨어나고, 사물은 다시 되어가며, 그 되어감은 삶의 태도로 옮겨지고, 끝내 검은 안식이라는 나의 철학 안에서 조용히 쉰다.
그러므로 나의 단시는 철학을 설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시가 자기 몸으로 먼저 감각하고, 그 감각이 사유를 부르고, 사유가 다시 삶의 윤리로 옮겨갈 때, 그때 비로소 철학은 자기 발생적으로 살아난다. 내가 쓰고자 하는 철학시는 바로 그런 시다. 개념이 시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시가 개념을 조용히 피워내는 자리. 작은 것들이 자기 이름을 잃지 않은 채, 더 깊은 사유의 문을 열어젖히는 자리. 그곳에서 나의 단시는 끝나지 않고, 다시 시작된다.
내가 의도하지 않고 썼던 ‘글쓰기’ 철학시 세 편은 결국 하나의 철학으로 수렴한다. 그것은 ‘되어가기’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세계의 모든 글은 그것을 쓴 이의 사유가 집약된 자리이므로 결국 그 자신이다. 그러나 글은 그 자신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을 자기 삶으로 받아들이는 이들과 함께 다시 철학의 숨을 얻고, 새로운 사유로 ‘되어가는’ 역동적인 문학의 놀이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