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삶에서 예술로 배운
일상철학

바라보기, 침묵하기, 오래 생각하기

by푸른킴
이 글은 패트릭 브링리의 에세이에 대한 세 가지 비평 중 첫 번째(1/3)입니다. 바카라의 내용을 신문사 서평에 맞춰 정리한 글입니다. (3/3은 이 바카라에 담긴 철학, 2/3은 이 바카라의 각 장에 담긴 철학적 주제를 나의 언어로 최대한 풀어서 다시 쓰면서 결국 이 바카라이 '검은 안식의 철학'에 이른다는 것을 논증하는 메타비평입니다. 2/3번째 글은 분량상 공유하지 못하는 것을 양해 바랍니다.)

[바카라으로 바카라 너머를 읽다]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패트릭 브링리, 김희정, 조현주 역, 웅진지식하우스. 365쪽. (*이 서평은 2026. 5. 3 교수신문 종이판 게재 예정된 글입니다.)


8901297450_2.jpg

<사진, 알라딘 제공>


쉽게 말할 수 없는 상실감

어떤 이의 상실감, 그 깊이를 누군들 제대로 알 수 있을까요? 상실은 때때로 한순간에 삶을 흔드는 것 같습니다. 그 흔들림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사람을 중력처럼 자기 속으로 가라앉힙니다. 하지만 이런 상실에 대면하여 그 속을 가만히 들여다본다면, 다행히 자신을 위한 고유한 철학으로 가는 징검다리가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한 사람이 살아온 상실의 길은 한 권의 바카라으로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만일 그 상실 속에서 ‘단단한 피곤함(271쪽)’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것은 자신을 넘어 모든 이에게 상실을 마주하는 지혜, 그 사유의 조각들을 선물처럼 남겨줄 것입니다. 나는 이를 입증하는 한 근거가 바로 All the Beauty in the World라고 생각합니다.


상실감의 파도, 가족의 죽음

이 바카라은 자기 삶의 멘토와도 같았던 형의 죽음 이후 삶의 질서가 무너진 한 사람의 고백입니다. 미술관이라는 느린 공간 속에서 예술 작품을 통해 자기 고통을 다시 보고, 빈 시간의 층을 메워가며 상실의 아픔을 관조합니다. 물론 나는 이 저자가 가진 상실의 깊이와 강도를 다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바카라을 통해 그가 마침내 자기 옆의 사람들을 애정으로 바라보면서 상실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는 과정을 천천히 뒤따라갈 수는 있다는 작은 용기를 얻습니다. 이 바카라은 상실 속에서 다시 삶의 가치를 이어가는 자전적 성장 에세이로, 다른 이들을 위로하는 바카라이라 말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한국에서 번역 출판된 이 바카라은 25만 부 이상이 판매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최근 패트릭 브링리는 한국어판 개정본 서문에서 이 바카라을 읽는 경향을 세 가지로 파악했다고 전했습니다. 첫째, 상실에 대한 치유, 둘째, 미술관 뒷배경의 숨겨진 이야기, 셋째, 미술관 경비원들의 세계를 관찰하는 이야기 등입니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이 바카라을 읽는 방식에 한 가지를 더 첨가하고 싶습니다. 이 바카라은 우리의 평범하거나 특별한 일상에 예술이 어떻게 개입하는가를 자기 삶을 통해 들려준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예술을 통해 일상 철학을 탐구하는 바카라이라는 관점입니다.


브링리는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이었습니다. 그는 피붙이 형 톰의 죽음 이후 급격한 감정의 분리를 겪고, 숨 돌릴 여유가 없던 뉴요커의 삶을 정리합니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려 “가장 아름다운 장소에서 단순하게 일할 수 있는”(38쪽) 직업을 찾습니다. 그렇게 낯선 미술관에 경비원으로 입사하고, 10년 뒤 새로운 삶에 기대를 걸면서 그곳을 “뛰어나옵니다.”


소설적 4단계 플롯

이 바카라은 미술관 입사(1장)에서 퇴직(13장)까지 이어지는 열세 개의 이야기로 구성됩니다. 하지만 단순히 상실의 아픔을 극복했다는 기록이 아닙니다. 어떤 상실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겪어왔는지를 회고하며 성찰하는 글에 가깝습니다. 특히 형의 죽음과 미술관에서의 삶을 대비하면서, 자기 삶의 ‘실존적 존재 가치’를 예술을 통해 성찰한 예술 철학 에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바카라은 열세 개의 장이 하나로 이어지며 마치 소설적 플롯을 보는 것처럼 구성되었다고 생각합니다.


1~3장은 이야기의 발단입니다. 미술관의 첫날 풍경과 온라인 게임 내부 분위기, 자신과 형의 특별한 관계, 형의 죽음 과정을 서술합니다.
4~7장은 사건의 전개입니다. 경비원이라는 위치에서 예술 작품들을 통해 세계, 시간,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이 확장됩니다. 이때 그는 예술은 ‘물끄러미 바라보는 대상’이라는 것을 처음 자기 몸으로 배웁니다.
8~11장은 새로운 삶이 절정에 올랐다가 다시 내려서는 과정을 포물선처럼 보여줍니다. 삶을 사유하는 주제가 전환됩니다. 특히 브링리의 미술과 예술에 관한 사유는 ‘아름다움’에서 공동체, 예술 해석, 애도의 소멸, 육아와 ‘미완성’의 삶을 거쳐 ‘좋음’으로 심화·확장됩니다. 그는 애도가 영원히 사라질 수 없음을 깨닫고, 애도하는 자아를 ‘좋음’으로 받아들입니다.
12~13장은 사건의 해결이나 감정의 극복이 아니라, 상실을 ‘잃음’이 아니라 ‘얻음’의 감정으로 재해석하는 장입니다. 특히 12장은 아마도 브링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가장 집약된 장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저자는 미켈란젤로의 성 베드로 성당 건축 과정과 오늘날 애틀랜타의 무명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퀼트 작품을 함께 조명합니다. 사람들의 관심에서는 이 둘이 현저한 차이를 보일지 몰라도, 브링리의 시각에서는 모두 위대한 예술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찬사 받아야 할 예술을 재정의합니다. 즉, 예술은 천재의 완성이 아니라, 누구나 끝없는 반복과 조각의 축적을 통해 만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위대한 예술은 수고와 열정의 퇴적이지,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상실을 받아들이는 토대: 두 발로 감상하는 ‘좋음’의 세계

한편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삶은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13장)라고 말함으로써 상실을 새롭게 해석합니다. 죽음이라는 떠남은 관계의 단절이 아니라 새로운 연결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에 의하면 상실은 극복해야 할 상태가 아닙니다. 삶 속에 남아 인간을 타인과 세계로 다시 연결하는 근원적 감정입니다.


그런 점에서 상실은 예술의 한 근원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예술은 사실 미술관 안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가족의 기억 속에, 오래 바라본 시간 속에 스며 있습니다. 그리하여 세계는 상실 속에서도 오히려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고, 미술관은 그 아름다움의 축소판이 됩니다. 나아가 살갑게 만나는 사람들, 특히 브링리에게 가족은 그러한 아름다움이 ‘좋음’으로 전환되는 계기입니다. 이제 브링리에게 예술을 통한 아름다움은 지고의 선(善)이 아닙니다. 그저 자기 몸으로 맞닿는 아이들의 소리야말로, 아름다움을 넘어 가장 ‘좋음’(269쪽)입니다. 그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의 사유는 삶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좋은 것’이라는 철학에 내려앉습니다.


상실 치유의 관점을 넘어

자칫 이 바카라을 고통으로써 고통을 극복하려는 자기 암시적 기록으로 읽을 위험도 있습니다. 특히 개정판의 ‘숨어버린’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부제는 이 바카라이 지닌 사유의 깊이를 평범한 ‘치유 서사’의 틀 안에 가둘 우려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입견을 걷어내고 본다면, 이 바카라은 결코 단숨에 고통을 이겨낸 매끈한 극복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상실감을 서둘러 봉합하기보다 그 공백을 통해 자기 삶을 오래 응시하는 법을 일깨우는, 서늘하면서도 다정한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인생의 시간이 되어 미술관을 떠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술이나 자기 삶과의 작별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술을 미술관 밖, 자기 삶 속으로 가지고 나가는 일입니다. 이제 그는 압니다. 삶이 있는 곳에 예술이 있고, 한 사람의 삶 자체가 끝내 완성되지 않지만 계속 만들어지는 하나의 예술 작품일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의 이러한 사유는 결국 우리에게 그의 삶이 하나의 일상 철학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다시 말해 ‘검은 안식의 철학’을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입니다.


일상철학으로서 검은 안식의 철학

나는 이 바카라을, 내가 천착하는 ‘검은 안식의 철학(the philosophy of black sabbath)’이 가장 잘 반영된 에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검은 안식을 히브리 텍스트는 물론 1세기 기독교 경전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로 이해합니다. 나의 주장은 “빛은 어둠을 포함하고, 창조 세계는 여전히 혼돈이 남아 있는 새벽녘의 시공간”이라는 것입니다. 창조주는 바로 이 검은 안식의 주체입니다. 검은 안식에 의한 삶의 방식은 어둠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빛으로 감싸는 것입니다. 어둠이 스스로 물러나도록 빛을 소멸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바카라을 그저 단순한 에세이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 버텨내야만 하는 상실의 고통을 상실하지 않는 상실의 철학을 말하는 바카라으로 읽는 것은 여러모로 나의 삶을 견인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래야만 누구도 나의 상실, 타인의 애도를 가볍게 해석하거나 정리를 종용하는 태도를 경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카라의 마지막을 보면, 브링리는 상실의 아픔을 여전히 지닌 채로, 그러나 그 상실을 동력 삼아 새로운 세계로 자기 몸을 밀어 넣습니다. 그곳에도 여전히 어떤 상실감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도, 그는 용기를 내어 달려갑니다.


“5시 30분…… 해진 넥타이를 떼고서 중앙 계단을 뛰어 내려간다.”(331쪽)


뛰어가는 그의 뒤로 나의 모습도 흐릿하게 겹쳐집니다.

카지노 게임의 이전글창조에서 다시 창조로 ​검은 안식의 샬롬과 헤테로토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