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가 스스로 만들어가는 브랜드 서사의 비밀
"우리 집에 크림 상자가 일곱 개나 모여 있어요."
크림(KREAM)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이 작은 댓글 하나는 단순한 구매 후기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신발을 꺼내고 나면 미련 없이 버려지던 포장 상자가, 누군가의 방 한구석에서는 수집의 대상이자 자랑거리로 탈바꿈해 있었기 때문이다. 양현영 마케터가 엑셀 시트 속 매출 그래프가 아닌, 진짜 팬의 존재를 체감한 순간이었다.
이처럼 구매자를 자발적인 팬으로 바꾸는 서사의 비밀을 풀기 위해 2026년 8월 맥스서밋 무대에 두 사람이 올랐다. 스탠리1913의 이동형 매니저와 크림의 양현영 마케터가 그 주인공이다. 슬롯자는 수많은 브랜드가 집착하던 AI나 제작 기술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브랜드가 판을 깔고 소비자가 무대를 채우는 '진정성 있는 경험'의 본질에 집중하도록 논의를 이끌었다.
크림은 한때 AI 기반 콘텐츠를 적극 활용하며 평균 조회수를 11만에서 198만까지 끌어올리는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 그래프는 완벽한 우상향을 그리고 있었지만, 인스타그램이 사람 냄새나는 날것의 일상 콘텐츠를 밀어주겠다고 밝히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교복을 입은 학생이 촬영한 소박한 영상이 수천만 조회를 기록하는 동안, 브랜드가 사력을 다해 만든 공들인 영상은 300만 회의 벽에 걸려 멈춰 섰다.
양현영 마케터가 주목한 것은 단순한 조회수 감소가 아닌 '싸움터의 성격이 변했다'는 사실이었다. 브랜드의 정교한 연출이 일반인의 압도적인 자발성을 이길 수 없다는 판세를 읽은 그는 직접 뛰는 플레이어의 역할을 내려놓기로 결심했다. 성과가 나고 있던 내부의 반발 속에서도 숫자와 흐름으로 설득을 이어가며, 브랜드의 역할을 '직접 연출하는 주체'에서 '소비자가 뛰어놀 판을 깔아주는 기획자'로 전환시켰다.
성공적인 판 깔기는 세상에 없던 새로운 놀이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이미 일상에서 즐기고 있던 행동을 포착해 무대를 마련해 주는 일이다. 양현영 마케터가 기획 시 스스로 던지는 질문은 하나다. "이거 사람들이 이미 하고 있는 행동인가?" 대중이 이미 즐기고 있던 흐름 위라면 브랜드가 따로 참여를 설득하는 수고를 덜 수 있기 때문이다.
크림이 진행한 '사생대회'는 종이 상자로 게임기를 직접 만들어 노는 아이들의 영상에서 착안했다. 이미 뭔가를 만들고 싶어 하는 대중의 욕구 위에 "크림에서 갖고 싶은 것을 만들어 오라"는 명분과 해시태그 하나를 얹었을 뿐이지만, 이 기획은 364명의 열성적인 참여와 1,500만 넘는 조회를 기록하는 거대한 장이 되었다.
이러한 판 깔기의 유효성은 이어진 '릴스 대회'에서도 다시 한번 증명되었다. 중고등학생들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형성된 학교별 릴스 유행을 포착해 무대를 마련해 주자, 24개 팀이 참여해 총 425만 회의 조회수를 기록했으며 개별 영상은 최고 3,173만 회까지 치솟았다. 구경꾼을 참여자로 바꾸는 힘은 없던 마음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마음에 무대를 내주는 일에서 나오며, 이는 단발성 행운이 아닌 반복 가능한 구조임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유행을 다루는 기준 역시 화제성 그 자체보다 '우리의 상품 서사로 자연스럽게 착지할 수 있는가'를 엄격히 따졌다. 폭발적인 화제를 모았던 '두바이 쫀득 쿠키(두쫀쿠)' 열풍 당시, 크림은 유행을 무작정 따라 만드는 대신 역발상을 취했다. 쿠키 몇 개 값이면 크림에서 거래되는 상품을 살 수 있다는 '환산표'를 제시한 것이다. 두쫀쿠 2.8개면 시계를, 6개면 신발을, 66.5개면 무려 아우터를 살 수 있다는 재치 있는 비유는 이 기획의 강력한 유머 포인트가 되었다. 대중은 유행을 즐기는 동시에 자연스럽게 크림의 상품 가치를 인지하게 되었고, 이 기획은 좋아요, 댓글, 공유를 합쳐 1.2만이 넘는 인게이지먼트를 이끌어냈다.
113년의 역사를 지닌 스탠리 역시 한때 '얼음이 녹지 않는 튼튼한 공구 같은 텀블러'라는 기술적 프레임에 갇혀 있었다. 이동형 매니저는 제품의 스펙을 과시하는 수식어들을 과감히 걷어내고, 그 자리에 소비자가 감정적으로 몰입할 수 있는 '일상의 장면'을 배치했다. 만원 지하철을 뚫고 출근해 마시는 차가운 아메리카노, 한여름 록 페스티벌의 열기 속에서 즐기는 시원한 맥주처럼 직관적인 순간을 보여주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화법의 전환은 현장의 오프라인 경험으로 확장되었다. 록 페스티벌 현장에서 스탠리 제품을 가져온 이들에게 얼음을 채워주는 '쿨링 구조대'를 운영하고 직접 액세서리를 꾸며보게 한 것이다. 소셜 미디어와 현장을 잇는 장치를 심어 현장에 오지 못한 팔로워들까지 경험의 맥락에 참여하도록 유도했고, 이는 일방적인 제품 홍보가 아닌 브랜드와 사용자가 함께 만드는 축제의 장면으로 기억되었다.
아티스트 및 글로벌 파트너들과의 협업 또한 같은 원칙 위에 서 있었다. 제니와의 협업에서는 단순한 포토카드 증정이 아닌 명품 가방을 언박싱하는 듯한 경험과 메시지를 설계했다. 축구 선수 메시와의 협업 역시 그가 경기 전마다 마테차를 마시는 것으로 이미 유명했고 실제로 스탠리 제품을 사용하고 있던 기존의 리추얼을 연결한 결과였다. 아스널, PSG, 유벤투스 같은 유럽 명문 구단들과의 장기 협업은 선수의 유명세보다 팬들의 라이프스타일에 초점을 맞췄으며, LG 트윈스와의 협업 역시 한국 야구팬 특유의 응원 문화라는 일상의 접점을 진정성 있게 짚어낸 사례였다.
그러나 소비자에게 무대를 넘겨주는 전략이 언제나 손쉬운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기획자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세 가지 명확한 제약 조건이 존재한다.
첫째는 '계정의 기초 체력'이다. 수억 회의 누적 조회수를 담보하는 크림이나 모여 있는 사용자 층이 두터운 대형 커뮤니티가 아닌, 참여자가 부족한 극초기 계정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판을 깔아 두어도 호응을 얻지 못하고 빈 무대로 남을 위험이 크다.
둘째는 협업을 현실화하는 '자원의 규모'다. 스탠리가 보여준 메시지나 제니와의 협업, 유럽 명문 구단들과의 장기 파트너십, 7개국 동시다발적 팝업 스토어 같은 기획은 단순히 아이디어의 진정성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강력한 글로벌 브랜드 파워와 이를 받쳐주는 막대한 예산 및 인프라라는 자원이 필수적이다. 자원이 부족한 브랜드라면 화려한 협업 목록을 복제하려 하기보다, 이미 우리 제품을 깊이 있게 소비하고 있는 진성 고객을 먼저 찾아내어 진정성을 쌓아 올리는 전략적 선회가 필요하다.
셋째는 대중의 미세한 행동 변화를 남보다 먼저 포착해 내는 '감각의 속도'다. 이미 형성되어 있는 대중의 행동을 남보다 한 발 앞서 파악하지 못하면 유행은 이미 식어버리고, 아무리 빠르게 발견하더라도 브랜드의 본질과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다면 남의 잔치에 숟가락만 얹는 결과로 끝나기 쉽다.
결국 크림과 스탠리가 다다른 도착점은 하나로 수렴한다. 크림은 콘텐츠를 직접 잘 연출하는 주체의 자리에서 내려왔고, 스탠리는 제품의 우수성을 일방적으로 자랑하는 자리에서 내려왔다. 두 브랜드 모두 무대의 한가운데를 비워두었고, 그 빈자리를 소비자의 자발적인 경험과 서사로 채워 넣었다.
참여를 강요하고 요구하는 순간 고객은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고 뒤로 물러선다. 브랜드가 설계해야 할 것은 소비자의 행동을 통제하는 기획이 아니라,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지는 매력적인 경험의 장 그 자체다. 팬덤이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면, 기획자가 통제하고 설계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은 팬의 마음이 스스로 움직일 수 있도록 정성껏 마련된 '무대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