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기사님이 대로변에 차를 세우고 내 연락처를 물었다

불안의 시대, 우리가 진짜 챙겨야 할 것들

by조인후

대한민국 혁신의 심장이라 불리는 판교 테크노밸리. 이곳의 오전은 언제나 첨단 기술만큼이나 빠르게 흘러간다. 화장품 제조사와의 미팅을 마치고 나온 오전 11시, 습도는 이미 불쾌지수의 임계점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길 건너편으로 가야 할 버스가 보였다. 건널목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뀐 순간, 정류장까지 남은 거리는 약 200미터.


습한 공기를 뚫고 질주할 용기는 있었다. 하지만 옆에 선 동료의 완벽한 원피스 복장과 정성스러운 메이크업이 발목을 잡았다. 자칫 땀방울로 공들인 화장을 망칠 순 없었다. 결국 암묵적인 동의하에 버스를 고이 보내기로 합의했다. 전광판에 찍힌 다음 버스의 대기 시간은 8분. 그러나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거대한 빨간색 광역버스가 정류장에 미끄러지듯 들어섰다.


시간표를 무색하게 만드는 이 뜻밖의 조기 도착은 기다리는 승객에겐 축복이지만, 동시에 이 지역 대중교통 배차 간격의 ‘예측 불가능성’을 방증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문이 열리자, 기사는 승객을 친절한 인사로 맞이했다. 대중교통의 삭막한 침묵에 익숙한 도시인에게 기사의 따뜻한 환대는 제법 정겹게 다가왔다. 그러나 그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정적을 깨는 굉음, 그리고 시작된 길거리의 난투극


다음 정거장을 지나 신호 대기를 위해 버스가 멈춰 선 순간, 차체를 울리는 강렬한 충격음이 들려왔다. '쾅!'


순간 내 뇌리를 스치는 수많은 가설. 정차 중인 차에 사고가 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아니면 이 첨단 도시에 고라니라도 출현한 걸까? 그 고라니가 육식이라도 해서 이 빨간색 광역버스를 들이받은 걸까?


짧은 혼란은 기사의 거친 숨소리와 함께 깨졌다. 분노로 가득 찬 기사가 문을 열고 도로 위로 뛰어내렸다. 그곳에는 정장 차림에 백팩을 멘 한 젊은 남성이 전투태세를 갖춘 채 서 있었다. 그의 입에서는 이미 정제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육두문자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OO놈아, 왜 문을 안 열어주는 거야!"


남성의 절규에서 사건의 경위가 드러났다. 그는 간발의 차로 버스를 놓쳤던 것이다. 그가 보기에 기사는 충분히 멈춰 서서 기다려줄 수 있었음에도 자신을 외면한 채 출발했고, 이에 격분한 남성이 달리는 버스를 쫓아와 맨몸으로 차체를 타격한 상황이었다.


5분을 참지 못한 도시인의 분노, 그리고 유치함의 정점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과연 이 사태가 다 큰 성인이 도로 한복판에서 고성을 지르고 분노를 폭발시킬 일인가 하는 점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 버스의 배차 간격은 고작 5분이었다. 낮 시간대에 20분이 넘는 배차 간격으로 승객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경의중앙선에 비하면, 5분은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이다.


잠시 동안 그 분노 조절 장애의 청년에게 연민의 감정이 들기도 했다. '오늘 오전 업무가 끔찍하게 꼬였던 걸까', '혹시 회사에서 짐을 싸서 나오는 길에 버스마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한 걸까'. 도시의 냉혹함에 상처받은 영혼을 향한 내 동정심이 고개를 들려던 찰나, 청년은 결정적 한 방으로 그 모든 측은함을 날려버렸다.


그는 기사의 머리를 가리키며 악을 썼다.


"야, 이 대머리야!"


그 순간 연민은 경악으로 변했다. 그것은 명백히 선을 넘은 인격모독이었다. 청년의 날 선 공격에 기사 역시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모욕적인 단어를 전해 들은 기사는 즉각 검지를 하늘 높이 치켜세우며 소리 없는, 그러나 강렬한 보복의 제스처를 시전했다. 법정 공방을 방불케 하던 도심 속 설전은 순식간에 유치함의 정점으로 치달았다.


버스 창문이라는 완벽한 스크린을 통해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이 광경은, 틱톡이나 유튜브 쇼츠의 그 어떤 자극적인 콘텐츠보다 흡인력이 있었다. 당장 누군가의 주먹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을 일촉즉발의 상황. 다행히 파국으로 치닫기 직전, 기사가 버스로 발길을 돌리며 길거리의 난투극은 일단락되었다.


연대와 위로의 공간으로 변모한 버스 안


운전석으로 돌아온 기사의 얼굴에는 분노와 억울함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직전에 탑승했던 승객을 향해 억울함을 호소했다.


"손님, 제가 분명 이전 정류장에 차를 세우고 손님을 태우지 않았습니까?"


그 승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아요. 저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니 그냥 무시하세요"라고 기사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 지지에 기사는 결국 참았던 감정을 터트렸다. "기사들이 늘 이렇게 무시를 당한다. 서러워서 이 짓도 못 해 먹겠다"며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한 목소리로 토로했다.


이 서글픈 고백은 버스 안의 공기를 순식간에 바꿨다. 승객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거들며 기사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세상에 별난 사람 많습니다." 조금 전까지 삭막했던 대중교통의 내부는 순식간에 서로를 보듬는 따뜻한 연대의 공간으로 변모했다. 위로에 힘을 얻은 기사는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20260527_115403.jpgⓒ비즈니스 스토리텔러 조인후


침묵하는 목격자들, 그리고 내가 뻗은 손


그러나 평화는 서울 경계선에 진입함과 동시에 다시 흔들렸다. 문득 사후 법적 공방이나 징계 절차가 걱정됐는지, 기사는 차를 잠시 세우고 운전석과 가장 가까이 앉았던 '위로의 주역'에게 슬그머니 말을 건넸다. 밖에서 일어난 상황을 목격했냐는 질문이었다.


그러자 흥미로운 반전이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 세상에서 가장 이타적인 태도로 기사를 위로하던 승객이 돌연 태도를 바꾼 것이다.


"아... 사실 저는 잘 보지 못했습니다."


귀찮은 송사에 휘말리고 싶지 않은 현대 도시인의 전형적인 방어기제이자 이기심이 고개를 드는 순간이었다. 답답함이 극에 달한 기사는 확인 사살을 하듯 재차 물었다.


"저보고 대머리라고 하는 거 진짜 못 들으셨습니까?"


조용하던 차내에 또 한 번 자극적인 단어가 파동을 일으켰다. 방관자로 남으려는 이들의 침묵 속에서, 결국 내가 직접 나서기로 했다.


"기사님, 제가 다 들었고 다 봤습니다. 그 청년이 기사님 머리에 손가락질하면서 대머리라고 모욕한 거, 제가 똑똑히 들었습니다."


그제야 기사의 얼굴에 안도감이 스쳤다. 그는 서둘러 펜과 종이를 건넸고, 나는 망설임 없이 내 이름과 연락처를 적어 내려갔다. 필요하면 언제든 증인이 되어 주겠다는 말에 기사는 연신 고개를 숙였다.


목적지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까지도 나를 붙잡은 건 묘한 동질감과 부채감이었다. 문이 열리기 전, 기사에게 다시 한번 당부의 말을 건넸다.


"너무 신경 쓰지 마시고 필요하면 꼭 전화 주세요."


불안의 시대, 우리가 진짜 챙겨야 할 것들


버스가 떠난 뒤 밀려오는 습한 공기 속에서 문득 사건의 본질이 보였다. 내가 기어이 연락처를 남기며 증인을 자처한 건, 기사의 모발이 풍성해서가 아니었다. 진실은 잔인했다. 그는 청년이 소리친 '그 상태'에 지극히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청년의 폭언은 단순한 모욕을 넘어, 대낮의 도로 한복판에서 가장 감추고 싶었을 치부를 정확히 조준한 잔혹극이었다. 터무니없는 거짓말은 헛웃음으로 넘길 수 있지만, 엄연한 현실이자 현재진행형인 콤플렉스를 타격당하면 영혼이 무너진다. 날지 못해 웅크린 타조를 향해 "날개도 없는 새"라며 뼈를 때린 격이랄까. 기사가 그토록 서럽게 울컥했던 이유도, 내가 차마 발길을 돌릴 수 없었던 이유도 바로 그 '사실적시'의 잔인함에 있었다.


뒤이어 냉소적인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평생 다시는 보지 않을 초면의 타인에게 굳이 그렇게까지 인신공격을 퍼부어야 했을까. 결국 기사의 서글픈 탄식대로, 상대가 '버스 기사'였기에 기꺼이 무시하고 폭주한 것일지 모른다. 만약 그가 놓친 것이 버스가 아닌 항공기였고, 상대가 제복을 입은 파일럿이었다면 "머리가 비었다"며 대머리라고 소리를 질러댔을까. 절대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상대가 약자라는 확신이 드는 순간에만 작동하는 현대인의 졸렬한 분노 조절 장치가 그날 판교 도로 위의 씁쓸한 풍경을 만들어낸 셈이다.


이 지점에서 서글픈 공포가 엄습한다. 우리는 인공지능(AI)이 이끄는 눈부신 첨단 기술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 똑똑하고 편리해졌는데, 정작 그 안의 인간들은 왜 이토록 나약하고 날카로워지는 걸까. 도로 위에서 마주하는 분노조절장애는 이제 현대인의 흔한 감기처럼 보인다.


모두의 불안지수가 여름날의 불쾌지수만큼 치솟는 요즘, 첨단 기술이 인간의 영혼까지 구원하지 못한다는 증거는 오늘 판교의 도로 위에도 차고 넘쳤다. 이제는 육체의 체력뿐만 아니라, 쉽게 부서지는 멘탈을 먼저 돌봐야 한다. 각자의 일그러진 정신 상태를 점검하는 '마음 방역'이야말로 이 똑똑한 세상에서 우리가 시급히 챙겨야 할 생존 전략 아닐까. 씁쓸한 여운을 삼키며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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