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륨, 그리고 국장이 멈춘 날
휘발유 리터당 1,700원대. 뉴스에서는 연일 기름값 하락을 얘기하는데 주유소 앞에 서면 숫자가 영 시원찮다. 왜 그럴까, 한 번쯤 따져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구조를 들여다보면, 기름값 너머로 훨씬 불편한 문제가 눈에 들어온다.
기름값은 왜 안 내리나 — MOPS와 유류세 구조
2001년 이전까지 국내 정유사들은 원유 가격에 연동해 주유소 공급가를 정했다. 원유가 내리면 기름값도 내렸다. 그런데 국민 불만이 터지자 정부는 그 해 하반기에 기준을 바꿨다. 그때부터 적용된 게 MOPS, 즉 싱가포르 국제 석유제품 가격이다.
MOPS(Mean of Platts Singapore)는 S&P 글로벌이 싱가포르 현물시장의 석유제품 거래가를 매일 집계해 발표하는 지수다. 정유사들은 전주 MOPS를 기준으로 이번 주 주유소 공급가를 결정한다. 여기에 3% 관세, 리터당 16원의 석유수입부과금, 유통비용, 정유사 마진이 더해지고, 그 위에 세금이 얹힌다. 교통세 529원, 교육세 79.35원, 주행세 137.54원, 부가세 10%. 합산하면 리터당 약 820원의 유류세다. 현재는 7% 한시 인하가 적용돼 실질 부담은 약 768원 수준이다.
실제 MOPS 데이터를 보면 상황이 선명해진다. 2월 20일 배럴당 77.60달러였던 92 RON 휘발유가 3월 6일 113.13달러까지 올랐다. 같은 기간 등유는 92.52에서 160.54로, 경유는 92.07에서 154.74로 치솟았다. 정유사들이 기준대로 2주 시차를 두고 공급가에 반영한다면, 이 급등분은 아직 주유소 가격에 완전히 반영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기름값은 더 오를 수 있다.
WTI가 아니라 두바이유 — 한국 기름값의 실제 기준
우리는 보통 원유 가격이라고 하면 WTI를 떠올린다. 뉴스도 대부분 WTI 기준이다. 그런데 WTI는 미국 텍사스산 원유를 한 달 뒤에 인도하는 선물 가격이다. 한국은 미국산보다 중동산 원유를 훨씬 많이 수입한다. 한국 기름값에 직접 영향을 주는 건 WTI가 아니라 중동산 원유를 대표하는 두바이유 현물가격이다.
한국석유공사 PETRONET에 따르면 두바이유는 3월 5일 기준 배럴당 94.93달러로 전주 대비 8.59달러 급등했다. 한국은 원유 수입의 70% 이상을 중동에서 들여오기 때문에, 두바이유 현물가격이 국내 물가에 미치는 영향은 WTI보다 크다.
그런데 3월 7일, 상황이 한 단계 더 올라갔다.
이스라엘이 이란 수도 테헤란의 석유저장시설 30여 곳을 공습했다. 전선이 에너지 인프라로 확대된 것이다. 검은 연기가 테헤란 상공을 뒤덮었다. 석유 자산을 태워버리겠다는 이 공격은 트럼프의 의도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측근에게서 흘러나온 말이 직접적이었다. '대통령은 그 공격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석유를 보존하고 싶어 하지, 태워버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런 장면은 사람들에게 휘발유 가격 상승을 떠올리게 한다.'
WTI는 장중 최고 111.24달러까지 치솟았다. 전일 대비 22% 폭등한 수치로, 2022년 7월 이후 최고치다. 지금(3월 9일) 현재도 106달러대를 유지하고 있다. 이란군 대변인은 즉각 경고를 내놨다. '이란이 주변 산유국들의 석유·천연가스 시설을 공격하면 유가가 배럴당 200달러까지 치솟을 수 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가 생겼다. 해협은 봉쇄가 풀리면 바로 정상화된다. 그러나 파괴된 시설을 복구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저장시설이 망가지면 생산·수출 일정이 틀어지고, 그 여파는 단기에 끝나지 않는다.
국장이 멈췄다 — 서킷브레이커 연속 발동
이란 석유저장시설 공습과 유가 급등의 충격이 한국 주식시장에 그대로 전달됐다. 3월 4일 코스피는 전 거래일 대비 698.37포인트, 12.06% 하락해 5093.54에 장을 마쳤다. 이날 하락률은 2001년 9·11 테러 다음 날의 12.02%를 넘어서는 사상 최대 일간 낙폭이다. 코스닥도 14% 하락하며 역대 최대 낙폭을 경신했다.
그리고 3월 9일 오전 10시 31분, 코스피에 서킷브레이커가 다시 발동됐다. 3월 4일 이후 3 거래일 만이다. 매도 사이드카가 먼저 걸린 뒤 낙폭이 커지면서 20분간 모든 주식거래가 중단됐다.
서킷브레이커는 코스피 지수가 전일 종가 대비 8% 이상 하락이 1분 이상 지속될 때 20분간 매매를 중단하는 제도다. 20분 후 거래를 재개하되, 15% 이상 하락하면 다시 20분 중단, 재개 이후에도 20% 이상 하락하면 당일 거래를 조기 종료한다. 제도 도입 이후 20여 년간 코스피 기준 발동 횟수가 총 8번에 불과한데, 그중 6번째와 7번째가 닷새 간격으로 연달아 발동됐다. 9·11 테러, 서브프라임 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미국 신용등급 하향 충격, 코로나19 팬데믹이 국장을 세웠던 것처럼, 이번엔 호르무즈다.
기름값 너머에 있는 것 — 헬륨
그런데 이 글을 여기서 끝내면 절반만 이야기한 셈이다. 유가 충격보다 당장 더 무서운 문제가 있다. 헬륨이다.
많은 사람이 헬륨 하면 생일 파티 풍선을 떠올린다. 그런데 한국에서 헬륨은 전혀 다른 맥락에서 존재한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반도체 공정에서 헬륨은 웨이퍼 냉각과 공정 환경 유지에 쓰이는 필수 소재다. 대체재가 없다.
문제는 그 헬륨이 어디서 오느냐다. 한국무역협회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헬륨 수입량의 64.7%는 카타르산이었다. 카타르는 천연가스를 LNG로 만드는 과정에서 헬륨을 부산물로 함께 생산한다. 세계 헬륨 공급의 약 38%를 담당하는 최대 공급국이다.
카타르 LNG 생산이 멈추면 헬륨 생산도 같이 멈춘다. 월스트리트저널은 3월 6일(현지시간), 카타르 헬륨 생산시설 3곳이 이미 가동을 중단했다고 보도했다. 미국 화학회 발행 매체 C&EN은 '전 세계 헬륨 공급량의 3분의 1이 시장에서 사라졌다'며, 갈등이 2주 이상 지속되면 헬륨 사용자들의 혼란은 수개월간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희귀 가스 공급 충격이 얼마나 빠르게 가격을 바꾸는지는 이미 본 적 있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의 일이다. 우크라이나 마리우폴의 아조우스탈 제철소는 소련 시대부터 산소를 대량 소비하면서 크립톤, 제논, 네온, 헬륨 같은 희귀 가스를 부산물로 생산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크립톤의 31%, 제논의 18%, 네온의 23%를 이곳에서 공급받았다.
아조우스탈이 전쟁으로 파괴되고 러시아가 수출을 제한하자, 공급의 85%를 장악하고 있던 중국이 가격을 끌어올렸다. 2022년 기준 네온 가격은 kg당 약 55~58달러에서 장중 한때 최고 500달러대까지 치솟으며 수개월 만에 수배에서 10배 안팎의 상승을 기록했다. 반도체 업계가 공급선을 다시 짜는 데 수개월이 걸렸다.
그때 한국 기업들은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삼성전자는 독일 린데와 협력해 2031년부터 평택에서 희귀 가스를 직접 생산하는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포스코홀딩스는 포스코충타이에어솔루션을 통해 2025년 11월 광양에 고순도 네온·제논·크립톤 생산공장을 세웠다. 국내 반도체 기업이 필요한 물량의 52%를 충당할 수 있는 규모다. 에어 리퀴드도 2025년 6월 천안에 크립톤·제논 정제공장을 완공했다.
그러나 이 대응 체계에도 빈틈이 있다. 포스코 합작법인은 원료가스를 중국 충타이에서 공급받는 구조다. 중국이 원료가스 수출을 통제하면 생산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 공급망을 국내로 가져왔어도 지정학적 리스크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건 아니다.
더 결정적인 문제는 헬륨이다. 네온, 크립톤, 제논은 30~50% 수준의 국내 생산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지만, 헬륨만은 여전히 구조적 공백이다. 셰일가스 비중이 70% 이상인 미국은 헬륨 함량이 낮아 생산량이 따라가지 못하고, 수출 물량은 생산의 약 20%에 불과하다. 수출 규모로 보면 카타르 8 대 미국 2의 격차다. 카타르를 미국으로 대체하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이유다.
호르무즈 하나가 막히면
기름값 이야기로 시작했는데 여기까지 왔다. MOPS에 유류세에 유통비용. 그 구조가 그렇게 짜여 있고, 지금 MOPS가 급등하고 있으니 가격은 더 오를 것이다. 그런데 지금 더 걱정해야 할 건 다른 데 있다.
호르무즈 해협 하나가 막히면 흔들리는 게 에너지만이 아니다. 반도체 공정도, 요소수도, 산업 전반의 핵심 소재 공급망도 동시에 흔들린다. 3월 4일과 9일, 국장에 서킷브레이커가 연달아 걸렸다.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금융위기, 2020년 코로나 팬데믹이 국장을 세웠던 것처럼, 이번엔 호르무즈다. 두바이유 현물이 배럴당 94.93달러를 찍고, WTI가 장중 111달러를 향해 뛰어오른 지금, 그 시나리오는 이미 우리 산업 현장 가까이에 와 있다.
어쩌다 보니 주유소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반도체 공장 앞에서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