훤칠한 키에 까무잡잡한 얼굴을 한 K는 웃을 때 유독 하얀 이가 빛나는 사람이었다.
그와 우리는 일본 요코하마시(橫浜市) 사쿠라기초(梅木町)의 어학원에서 만났다. 일본대학에 입학하기 전 언어를 습득하기 위해 거치는 어학원이기에 학생들은 모두 외국인이다.
일어 능력에 따라 반이 나뉘고 우리보다 먼저 일본에 온 K는 같은 반도 아니었는데 그와의 짧은 인연은 어떻게 시작된 건지 지금도 도무지 기억이 안 난다.
삼촌과 함께 어학원으로 등교한 둘째 날, 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사람 좋은 얼굴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일어 한마디 제대로 못 하는 우리를 데리고 어학원 근처의 편의시설을 알려주고 지하철역으로 가서 학생할인 정기권도 신청해 주었다.
그런 후 데려온 곳이 이곳, 야마시타(山下) 공원이었다.
공원을 산바카라하고 벤치에 셋이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그의 실수담을 화제 삼아 오랜만에 꾸밈없이 웃을 수 있었다.
그의 농담 덕분에 말도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 잔뜩 긴장했던 우린 잠시 편안하게 어깨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 후, K는 어느 날 갑자기 학원에서 보이지 않았고 나는 종종 혼자 바다를 보러 이곳에 오기도 했다.
야마시타공원은 요코하마(橫浜)를 대표하는 공원 중 하나이다. 항구 옆에 조성되어 있어 공원을 등지고 벤치에 않으면 짙푸른 빛의 태평양 바다와 그 위를 유영하는 여객선과 상선의 모습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정박해 있는 집채만 한 여객선과 그 보다 몇 배는 높게 우뚝 서 있는 등뒤의 빌딩들은 공원을 감싸 안고 있는 듯한 구조를 하고 있다.
공원 벤치에 혼자 앉아 있을 때면 뒤편의 병풍같이 우뚝 솟은 건물의 지지를 업고 눈앞에 광활하게 펼쳐진 바다로 힘차게 나아가야 할 것만 같은 의욕이 생기고는 했다.
그리고 속을 알 수 없는 깊은 바다는 유혹이라도 하듯 연신 하얀 포말의 손짓을 보내고 있었다.
도쿄를 방문할 때마다 마음 한편에서 요코하마에 들를지 말지를 갈등한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정착한 곳이어서인지 고향 같은 느낌이지만, 그곳을 떠난 지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요코하마에 한 번 다녀와야 하는데...'
풀어내야 할 숙제 같이 이 생각은 늘 옆구리에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K에 대한 고마움은 항상 동반되었다.
그러다가 지난주, 드디어 오래 묵혀 두었던 마음속 과제를 마쳤다. 도쿄에 머무는 동안 계속 쏟아지는 비 때문에 미루고 미루다 드디어 비가 그친 날이었다.
구름에 갇혀 있던 모든 햇살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작은 바늘을 품고 있는 듯 따가운 햇볕이 발산되고 있던 그날, 그 찜통더위 속에서 난 야마시타 공원으로 걸어 들어갔다.
트렌치코트를 입고 사진을 찍었던 30년 전의 내가 서있던 곳을 지나 왼편엔 공원 오른편엔 바다를 느끼며 걸었다. 그리고 육지의 끝, 바다의 시작점에 세워져 있는 철봉의 끝까지 나아갔다. 끝없이 길게 느껴졌던 철봉은 생각보다 짧았고 군데군데 녹이 슬어 있었다. 왼편에 자리한 공원은 눈이 부시도록 밝은 햇살아래 감추고 싶은 세월의 흔적을 들켜버린 노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스스로의 기억과 추억을 얼마나 각색하고 편집했던 것일까. 공원의 단정함을 제외하곤 머릿속 풍경과 눈앞의 실사는 사뭇 달랐다.
'이렇게 작았나.'
'별로 멋있지가 않네.'
'이 뜨거운 날, 여기까지 와서 확인할
필요가 있었을까.'
새벽부터 준비해 전철 타고 걷고 하며 한 시간이 훌쩍 넘는 수고를 들인 끝에
조우한 야마시타공원은 소박하고 노후했다.
직면한 현실에 나도 모르게 밀려오는 쓸쓸한 후회를 외면하려 애썼다. 와중에도 왜곡된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모습을 비교해 보느라 두 눈과 머릿속은 바쁘게 움직였다. 기억과는 먼 현재, 마치 스스로 만든 상상이었나 하는 의문들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빛났던 추억을 후락한 현실로 다시 정립하는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머릿속은 움직임을 멈추고 두 눈은 더 이상 포말이 일지 않는 바다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피천득의 수필 '인연'에서 작가가 아사코와의 세 번째 만남을 후회했듯 나도 요코하마와는 다시 만나지 않았던 게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추억은 그저 추억으로, 아름다웠던 한 때로 간직하고 있는 편이 나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K에 대한 기억은 정확한 것일까.
햇살아래 속절없이 방치되어 뜨거워진 손바닥 안에서 서늘한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덧붙임 : 피천득의 수필집에 실린 하나의 작품인 '인연'은 <그리워하는데도 한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는 문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사진 : 橫浜市 梅木町.
출처 :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