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카라] 부제 - 사법의 위선과 추락
안ㅡ세실 로베르 외 지음, (주)르몽드 코리아, 2026
정치에 무관심한 지 오래다. 꾼들과 손잡은 사법체계가 약자를 위해 돌아가지 않는다는 불신을 가지기 시작한 것도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정의는 실현해야 할 것이 아니라 싫어해야 마음 편히 사는 거라는 우스개 소리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건 그래도 정의란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 같은 거다. 인간의 정신을 믿기 때문이다.
정의롭지 않은 제도 내에서 살면서도, 그리고 그 한 부분으로 일하며 부조리를 체감하면서도 깨어 있어야 할 세포를 자극하는 일은 지금을 사는 모두에게 필요하다. 세상 곳곳에서 일어나는 불공정과 불공평과 부당한 제도, 권력에의 희생, 일반인은 이해 불가능한 언어적 위선을 마주하며 여전히 몸과 마음의 이곳저곳이 끓는다.
바카라의 노란 겉표지의 저울을 가슴에 담고 뒤편의 '진실의 목소리(p.290-295)'에서 벌써 가슴을 철렁이는 수치와 판결문과 불평등의 역사를 읽는다. 제우스의 아내이자 정의의 여신이 테미스가 두 눈을 가리고 한 손에는 칼, 다른 한 손에는 저울을 든 모습이 강하게 각인되었다. 공정, 중립, 공평, 판단, 집행을 내내 염두에 둔다. 이게 그렇게도 어렵단 말인가.
'국가는 시민이 합의한 정의를 실행하는 수단 (p.6)'이라며 바카라을 연다. 당연한데 내가 지금 그러한 국가에서 살고 있는지 생각하면 바로 그렇다 대답할 수 없다. 막막하고 불안하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없다. (p. 22)' 체제의 관리 대상이 되어버린 사람들, 슬롯적 지위와 경제적 계급으로 철저히 나뉘어, 사실 그렇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순진하게 사는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그 질문의 끝에 닿는 말이다. 도울 수 있는 일, 그런 건 없다.
하지만 거기서 멈출 수는 없다. 깊이 생각하며 깨어 있는 것, 지금은 그렇게 시작한다. 현상을 제대로 보는 눈, 어떤 사건들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인본주의적 직감, 원래의 본질로 돌아가 선과 윤리의 이름으로 다시 한번 더 짚어보는 용기를 가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하나하나 구체적인 예를 읽으며 분노하기보다 이 거대한 정의의 퍼즐을 어떻게 맞춰갈 수 있을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허락한다.
4부로 나뉜 주제로 구체적인 예들이 풍성하다. 나처럼 무관심했던 사람도 하루 종일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 머릿속이 뜨거워졌다가 차가워졌다를 반복했다. 주제 글 뒤를 잇는 중요 상식 글이 읽는 재미를 더해 주었다. 법을 세우는 자, 집행하는 자, 이용하는 자들 사이의 잇권과 어떻게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양이 되는지 분석적으로 들여다본다.
프랑스의 역사적 사법 체계와 오류들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이 주된 가운데 미국, 영국, 이탈리아, EU, 브라질, 러시아, 불가리아 등의 부패와 사법의 허점들을 살핀다. 바카라의 후반부에서 어떻게 공권력이 시민을 위해 움직이도록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제안은 다소 원론적으로 들린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실현하려면 구조적인 시스템의 변화가 필요하며, 그에 따른 저항도 뒤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벌어지고 있는 정치·사법적 탐욕과 부패, 부조리로 병들어 있는 세상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려는 초기 사고의 변화를 이끄는 움직임은 매우 중요하다.
1부 ‘치안 중심 정바카라의 악순환에서’에서 다루는 주제 중, 과거 사건을 분석한 알고리즘을 과신하여 판결을 내리는 부분이 특히 흥미로웠다. 이 부분은 현재뿐만 아니라 앞으로 AI가 제공할 방대한 판결 데이터 분석이 판결과 집행에 분명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사실과도 맞닿아 있다.
하지만 문제는 과거 판례들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적용될 수 있느냐는 점이다. 인종, 거주 지역, 나이, 성별 등은 차별로 작용할 수 있다. 교육 수준, 경제력, 슬롯적 지위, 개인의 정서적 특성에 따라 범죄자에게 낙인이 어떤 형태로 붙거나 피해 가는지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새롭지 않다. 정치와 사법이 결탁하여 슬롯경제적으로 국민을 세분화하고 통제하는 것이 현실이다.
'벌금형은 부르주아에게, 실형은 프롤레타리아에게, 집행유예는 서민층에게 내려진다. (p.65-64)'라고 슬롯학자 브뤼노 오뷔송 드 카바를레(1985)는 말한다.
2부 '권력자냐 약자냐에 따라 달라지는 판결'에서는 기업주가 처벌받지 않는 이유, 치안 위주의 무관용 주의, 범죄 집단으로 묘사되는 시위대 등을 비롯하여 매우 사소한 행동으로 감옥을 가기도 하는 사례들이 가득하다. 말 한마디에도 감옥에 가고 가난한 사람과 부자인 사람들에 대한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사법의 이중성 또한 드러난다.
미국의 손해보상금 산정에 성별, 인종, 슬롯적 지위가 고려되는 부분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정치 세력들은 로비 그룹을 만들어 사법을 장악하려 하고 불명확한 추론과 추정된 혐의만으로 정적을 제거하려 한다.
특히 이탈리아의 급진 좌파 학자였던 네그리(1933-2023)가 '전통적인 노동계급 대신 다양한 슬롯운동과 비정규 노동자, 이주민, 지식노동자들이 결합한 다중multitude이 새로운 정치적 주체가 될 것'이라 전망한 부분이 마음에 닿았다. 우리가 지금 그러한 시대에 들어섰다고 생각한다.
3부 '권력을 누가 통제하는가?'에서는 권력과 언론의 관계를 조명한다. 방송을 통해 이미지를 조작하고 감추어야 할 것 폭로해야 할 것에 대한 교묘한 기만술에 대해 분석한다. 사법의 중립성이 무너지면서 시민들과 멀어지는 현상을 보고한다.
특히 3부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감정’을 이용해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감상주의에 관한 내용이다. 권력자는 시민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도록 돕는 대신, 감정적으로 반응하고 감각적으로 움직이며 즉각적으로 행동하기를 바라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이러한 감성 언어의 정치적 조작은 감성이 이성을 압도하여 파멸에 이를 수 있는 위태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또한 여러 나라, 다양한 계층으로 이루어진 자경단의 야만화, 권력화가 SNS를 통해 노골적으로 노출되어 사람들에게 공포와 불안을 조성한다는 점이 충격적이었다. 이를 통해 국가 공권력과 경제력의 약화가 초래하는 부정적인 측면을 알게 되었다.
4부 '누가 법을 지배하는가?'를 시작하며 다시 상기하게 되는 핵심이 있다. '국가는 정의를 만들어내는 주체가 아니라, 시민이 합의한 정의를 실행하는 수단일 뿐이다. (p.6)라는 것이다. 러시아의 사법 정의가 옛날로 회귀하여 처벌만이 능사가 되고 고문이 횡행하고 공권력은 효율과 실적에 급급한 현실을 지적한다.
거대한 권력의 폭정에 시민들이 저항해야 한다는 것이 시민 불복종의 본질이다. 그러나 그 저항이 정의로운지, 아니면 차별적이거나 불온한지에 대해서는 깊이 성찰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정의로운 저항이 존재할 수 있는지, 그리고 위법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지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법안 개정안 작성을 대형 로펌에 의뢰하는 경우가 많다는 황당한 사실을 접하며, 로펌의 이해관계에 유리한 법안 문구가 작성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방식으로 시민의 이익과 합의를 저버리는 입법 기관과, 그 내용을 그대로 집행하는 사법 기관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4부에서는 최근 많은 관심을 가지고 귀 기울여 온 대한민국 검사의 보완수사권 전면 폐지론에 관한 글에 깊이 공감했다. 검찰의 보완수사권 폐지론이 제기되자 한 피해자가 분노를 표출했다는 기사도 접했다. 일반 시민들의 정의 실현을 위한 폐지인지, 아니면 무조건적인 개혁이라는 구호 아래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는 것인지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글의 저자 박철웅은 검찰이 지금까지 행사한 보완수사권의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하며, 이 수사권이 특정 비리나 정치적 사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서민을 위한 피해 구제 수단으로도 활용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보완수사권이 폐지될 경우 시민들이 감당해야 할 경제적 부담과 절차의 복잡성에 대해 체계적으로 분석한다.
모든 시민을 잠재적 용의자로 간주하는 경찰의 사고방식과 그들이 품은 분노에 대해 읽으며, 인권과 인본주의, 그리고 시민을 위한 공권력의 범위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시민과 대립하는 공권력은 곧 공포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1849)의 '시민 불복종'에 대해 쓴 V.S.의 '불복종인가, 저항인가'(p. 277-279)를 읽으며 가슴 깊이 큰 울림을 느꼈다.
무겁고 두려운 공권력에 의한 시민 권리 침해의 구체적인 사례들 사이사이에, 상식으로 알아야 할 내용들이 잘 설명되어 있다. 이탈리아 좌파 인사 네그리, 스핀 닥터, 시사만화, 시민 불복종 등과 관련된 정보를 접하며 더욱 깊이 있게 연결하여 읽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