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무진 30대를 위한 브란트퓐트 (brandpunt)

우리의 인생 제3장은 "핀트" 맞게 잘 살아가보자!

가장 아끼는 친구와 통화를 했다. 무려 다섯 시간 동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어찌나 많은지 말하고 싶은 주제를 잊을까 염려되어 휴지 조각에 키워드를 적어가며 대화를 이어갔다. 과묵함의 가치를 모르쇠 하고 얼른 친구와 신명 나는 티키타카를 이어가고자 발화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다 보니 사레까지 들렸다. 물은 깊을수록 소리가 없다고 하는데 참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실을 마주하며 세월이 흐를수록 이런 대화의 기쁨이 귀해진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죽마고우 친구와의 수다 기회를 십분 활용하고 싶었다. 조금의 침묵도 허락하고 싶지 않았고 가뜩이나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속마음을 털어놓기 어려워진 현실에서 우리는 서로의 얼굴이 띄어진 스크린을 응시하며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스무 살, 대학교 1학년 때 룸메이트로 만난 우리는 벌써 서른둘이 되었다. (만 나이로는 아직 서른이라고 아득바득 우기고 싶지만 이런 주장의 끝은 승리감이 아닌 씁쓸한 초라함만 남기기 때문에 여기서까지 굳이 나이에 연연하지 않기로 하자.) 여느 스무 살이 그렇듯 우리는 어렸고 젊음은 찬란히 빛이 났다. 도통 아무것도 모르겠는 것들 투성이었지만 실수는 기회비용이 아닌 경험치로 환산되는 시간이었고, 나름 굵직한 선택을 앞두고 도무지 갈피를 못 잡는 우리였지만 건강한 마음가짐과 서로를 예뻐해 주는 애정과 믿음을 바탕으로 우리는 앞을 향해 나아갔다. 그렇게 우린 오랜 시간 성실하게 고민하며 길고 긴 학위과정을 마쳤고, 졸업 후 각자 선택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한국을 떠나 미국의 서로 다른 두 도시에서 생활하며, 인생 제3장을 맞이했다.


다섯 시간 내내 이어진 수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키워드는 바로 "핀트"였다. "핀트"는 네덜란드어 "브란드퓐트(Brandpunkt)"에서 온 일본식 외래어인데 이는 "초점"을 뜻하는 네덜란드어 단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불이나 빛이 타오르는 것을 뜻하는 Brand (브란드)와 점을 뜻하는 Punkt (퓐트)가 결합하여 "빛이 모여 불이 일어나는 점", 즉 초점 (Focus)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친구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공대생이었지만 관습적인 성공의 잣대로 평가받거나 틀에 박힌 출세의 길을 쫓아가기엔 "핀트"가 남달랐다. 남들은 뻔하고 우리는 특별하다는 힙스터병이 아니라 우리가 갖고 있는 강점과 똑똑함의 온도가 다른 학생들과 같은 선상에서 평가받기에는 차이가 꽤 컸던 것 같다. 나의 경우 수학을 못하는 공대생이었다. 전공 학점은 졸업 요건을 채우기 위해 최소한으로만 수강했고 나머지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인문학 교양 수업과 과학기술정바카라학을 부전공으로 공부했다. 남들처럼 코드를 짜거나 미분방정식을 푸는 대신 좋아하는 카페와 도서관을 누비며 에세이 과제를 완성하기 바빴다. (당시에는 ChatGPT 같은 AI 에이전트도 없었는데 말이다.)


내 단짝친구의 경우 쇳소리와 3D 캐드 (CAD) 도면이 가득한 기계공학을 전공한 여성 엔지니어지만 누구보다 따뜻하고 섬세한 사람이었다. 너무 선입견 가득한 발언이 아닐까 조심스럽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녀는 조모임에서 스패너, 기어, 모터, 그리고 볼트를 조이며 로봇을 조종하기 위해 코드를 짰다. 내가 그녀를 완벽히 대변할 수는 없겠지만 거칠고 강인한 이미지의 기계공학을 전공하는 내내 친구는 여전히 부드럽고 감각적인 만들기를 좋아했다.


우리의 이런 특별함이 반드시 우리에게 불리하게 작용한 것은 아니었다. 생명화학공학도 역시 논리적인 글쓰기를 잘해야 훌륭한 연구자로 성장할 수 있고, 의생명과학 분야를 전공하다 보면 당장 내 연구가 어느 보건 정바카라에 의해 가장 큰 영향을 받을지, 어떤 치료 전략을 어떤 환자군에게 제공할 수 있을지 미리 고민하는 것 역시 과학자의 중요한 덕목이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섬세하고 공감력이 뛰어난 기계공학도는 미적 감각이 뛰어나고 사용자 입장을 충분히 고려한 제품을 디자인할 수 있다. 내가 가진 강점을 장점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충분히 고민하면 반드시 돌파구가 있을 것이고, 되려 경쟁자들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핀트"가 다르다는 인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특히 나의 경우 입학과 동시에 8학기 칼졸업 후 탈공대를 결심했지만 현재 학석박 학위를 마치고 미국에서 박사 후 연구원으로까지 미련 가득한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다. 요즘도 매일같이 연구실에 출근하며 실험을 이어가고 논문을 투고하고 리비전 계획을 세우고 지도교수님들과 미팅에 참석하지만... 여전히 내가 가장 재밌어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 포닥까지 하고 있다는 점이 참 아이러니 하지만 내 진정한 열정과 핀트가 안 맞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다행히 지금은 이것마저 내 일상이자 현실이라는 점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나를 여기까지 오게 했던 원동력은 더 잘하고 싶은 마음에 포기하지 못한 미련이 아닌 익숙함을 벗어날 수 있는 용기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핀트" 나간 선택을 일상 삼아 살아가는 일의 가장 큰 부작용은 바로 성립되지 않는 비교로부터 고통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내가 선택한 길에서 가장 성공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주변 그 차갑도록 똑똑한 사람들 사이에서 모두가 외치는 성공의 공식에 대해 가스라이팅을 당하다 보면 나 역시 동요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진심이 결여된 커리어에서 최고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을 여러모로 모순적인데 우선 진심이 결여됐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기 어렵다는 점이고, 두 번째로는 애초에 남들이 정의한 성공의 모습이 내가 상상한 출세의 모습과 괴리감이 크다는 점이다.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는 이유로 누군가 순위를 매길 때 그 리스트에 등록되어 있는 내 이름 석자를 보게 되는데 그런 순간이 올 때마다 이질감이 크게 느껴진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살다 보니 일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기 위한 고민은 뒷전이 되었는데 앞으로 (특히 지금처럼) 안정적인 직업을 모색하는 과정에서는 이런 부분을 채울 수 있는 나의 "일"을 찾는 게 중요할 것 같다.


이번 대화를 통해 당장의 고민에 대한 해결바카라을 발견한 것은 아니지만 문제를 마주하고 있는 우리들의 태도를 살펴봤을 때 스무 살 걱정인형이었던 과거에 비해 우리가 많이 성장했다고 느껴졌다. 물론 더 잘하고 싶고, 더 야무지게 살고 싶은 욕심 때문에 여전히 갑갑하고 불안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삶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우리의 답은 건강과 사람 (그리고 사랑)이다. 스트레스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지 않도록 내 주변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로 가득 채우고 그들과 서로를 아껴주고 위로하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새로운 삼십 대, 그리고 그 후의 인생을 살아가는데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 지 않을까 싶다.


청춘을 함께한 같은 학교 동문으로서, 앞으로의 인생을 나눌 동갑내기 친구로서, 그리고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여성 과학자로서, 할 이야기가 참 많았고 그래서 감사했다. 인생의 세 번째 챕터가 미국에서 시작되었으나 도입부가 불안정하다는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는 우리가 불안을 잘 다스리고 안정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약속했다. 새로 맞이하게 될 삶에 대한 두려움대신 설렘으로 채우자고 말이다.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마음이 콩닥거리는, 앞으로 일어날 일이 기다려지는 기대감으로 인생을 채우며 야무지게 살다가 인생의 네 번째 챕터는 다 같이 한국에서 이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


다가오는 11월 추수감사절이 더 기대가 된다. 친구가 많이 보고 싶은 여름의 마지막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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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든 낭만을 찾을 수 있는 우리들의 특별함이 결국 우리의 삶을 가장 다채롭게 만들어주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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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하지만 그 무엇보다 소중했던 추억 가득한 그녀와의 룸메이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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