쭈굴거려도 꿋꿋하게 마이웨이
10년 전, 인생에서 두 번째 영국 여행을 계획할 때만 해도 꼭 가고 싶은 곳은 첫 여행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빅벤뿐이었다. 그 외에는 그저 한국에서 멀리, 더 멀리 떠나고 싶었다. 한 달간의 유럽 여행 중 런던 여행 일정을 무작정 일주일로 잡아 놓고 그제야 런던 근교에 갈 만한 곳들을 찾았다.
그중에 눈에 들어온 곳은 세븐 시스터즈. 영국 남부 해안, 브라이튼과 이스트본 사이에 있는 새하얀 석회암 절벽이다. 세븐 시스터즈라는 이름은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7개의 절벽을 뜻하는데 사진 속 초원과 바다, 흰 절벽을 보자마자 여긴 무조건 가야겠다 싶었다.
문제가 있었다. 혼자 런던 여행을 해야 한다는 것. 한국에서 혼자 출발했고 영국 일정 이후부터 일행이 합류하기로 한 상태였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 내가 알아본 방법 중 가장 빠르고 저렴했던 건 4명이 모여 기차표를 끊는 것이었다. 혼여행자는 대부분 그렇게 세븐 시스터즈에 갔다. 여행자들은 보통 온라인 여행 카페에서 4인팟을 만들어 함께 기차표를 예매했다. 나도 여기저기 기웃거려 봤지만 대학생이나 20대가 대부분이었던 여행자들 사이에서 30대 중반인 내 자리는 쉽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포기할까도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구차하게 가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기 아쉬웠다. 이번이 내 인생 두 번째 영국 여행인데 다시 영국에 올 기회가 있을까? 싶은 마음이 당시에는 컸다. 같이 갈 사람이 없으면 혼자라도 가지 뭐라는 생각이 들었다. 겁 많던 여행 초보 시절의 나였다면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오기가 생긴 그때의 나는 일단 다른 방법부터 찾았다.
결국 기차 대신 버스를 택했다. 가격도 비싸고 시간도 오래 걸리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해도 안 뜬 새벽부터 고속버스를 타고 시내버스로 갈아타고 내려 또 한참을 걸었다. 차도 사람도 많지 않은 한적한 길을 걸으며 머릿속에는 낯선 여행지에서 범죄의 희생양이 된 사람이 나오는 스릴러나 공포영화의 시나리오가 자동으로 생성되고 있었다. 양이 풀을 뜯는 소리에 귀를 쫑긋하게 되고, 갑자기 보이는 자동차의 등장에 휴대폰을 꽉 움켜쥐고 온몸을 잔뜩 움츠린 채 걸은 지 한참. 하도 쭈굴 모드라 어깨에 담이 올 때쯤 코끝에서 짭짤한 바다 내음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빽빽한 나무숲들이 어느샌가 사라지고 시야를 가리는 물체들도 보이지 않았다. 점점 걸음이 빨라졌다. 그렇게 세븐 시스터즈에 도착한 순간, 눈앞에 펼쳐지는 압도적인 풍광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거센 바닷바람에 얼굴을 얻어맞고, 새하얀 절벽에 파도가 부딪치는 걸 한참 바라봤다. 그렇게 한참 풍경을, 공기를, 분위기를 만끽하고 인증샷까지 찍은 다음에야 명당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브라이튼 시내에서 산 샌드위치를 꺼내 우걱우걱 씹었다. 매대에 있던 영혼 없는 샌드위치 중 신중하게 그나마 생기 있는 놈으로 골랐는데 결과는 참담했다.
그날 먹은 샌드위치는 지금도 생생하다. 맛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걸 먹으며 떠올린 생각 때문이다. 4인팟에 끼지 못했다는 이유로 포기할까 고민했던 과거의 내가 떠올랐다. 그때 포기했다면 지금 이 인생의 명장면을 만나지 못했겠지? 골판지 맛 샌드위치를 씹으며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낸 그때의 내가 대견했다. 그때 처음 알았다. 자리가 없으면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된다는 걸. 그 뒤로도 가끔 사람들 사이에 끼지 못하거나 내 차례가 오지 않을 때면 그날을 떠올린다. 거기에 내 자리가 없었다. 그래도 결국 나는 그곳에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