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흘러가고, 나는 잠시 머물다 가는 술꾼일 뿐

12월 17일 재개봉하는 영화 <거룩한 술꾼의 전설>

by조하나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 때면, 따뜻한 와인 한 잔보다 더 깊게 가슴을 데워주는 영화가 있습니다. 1988년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며 에르마노 올미 감독의 이름을 세계에 각인시킨 걸작, <거룩한 술꾼의 전설>이 재개봉을 통해 우리 곁으로 돌아옵니다.


SF 걸작 <블레이드 러너>의 안드로이드로 기억되는 배우 룻거 하우어의 가장 인간적이고 아름다운 눈동자를 만날 수 있는 작품이자, 올미 감독이 남긴 '어른들을 위한 동화'. 실패한 인생에도 기적은 찾아오는가에 대한 이 쓸쓸하고도 다정한 대답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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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안갯속에 핀 가장 초라하고 성스러운 기적

<거룩한 술꾼의 전설>



"그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지만, 신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


파리의 센강 다리 밑, 알코올 중독에 빠져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노숙자 안드레아스(룻거 하우어). 어느 날 낯선 신사가 그에게 다가와 200프랑을 건네며, 형편이 풀리면 성녀 테레즈 조각상에 갚으라는 제안을 합니다.


영화는 안드레아스가 이 돈을 갚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정을 그립니다. 술의 유혹, 옛 연인과의 재회, 우연한 행운들이 교차하는 가운데, 그는 과연 약속을 지키고 '거룩한 술꾼'이 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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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드 러너'를 지운 룻거 하우어의 푸른 눈


이 영화는 배우 룻거 하우어의 재발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강인하고 차가운 이미지의 그가, 여기서는 세상의 모든 풍파를 맞은 듯한 유약한 노숙자로 변신했습니다. 그는 대사보다는 흔들리는 눈빛과 구부정한 어깨로 안드레아스의 순수함과 나약함을 연기합니다. 술 한 잔의 유혹에 무너지고 자바카라하면서도, 끝내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그의 푸른 눈동자는 영화 역사상 가장 슬프고 아름다운 클로즈업 중 하나로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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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바카라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구원'


제목의 '거룩한(Holy)'과 '술꾼(Drinker)'은 모순된 단어입니다. 안드레아스는 성인군자가 아닙니다. 돈이 생기면 술을 마시고, 여자를 만나고, 약속을 어깁니다. 하지만 에르마노 올미 감독은 그를 단죄하지 않습니다.


영화는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나약한지 인정하면서도, 그 나약함 틈새로 스며드는 '은총'을 이야기합니다. 완벽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노력하려는 그 마음 자체가 이미 기적임을 영화는 나직하게 속삭입니다. 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지만, 종교를 넘어선 보편적인 휴머니즘이 흐르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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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낀 파리, 그 몽환적인 우화의 공간


에르마노 올미는 파리를 낭만의 도시가 아닌, 안개와 비, 그리고 낡은 건물들이 빚어내는 정적인 공간으로 그려냈습니다. 스트라빈스키의 음악과 어우러진 영화의 미장센은 마치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있는 듯한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마치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차분하게 흘러가는 카메라는, 안드레아스의 뒤를 묵묵히 따르며 그가 만나는 사소한 우연들을 필연적인 기적으로 승화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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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술꾼의 전설>은 성공해야만, 약속을 지켜야만 가치 있는 삶이라고 다그치는 세상에 건네는 따뜻한 위로입니다. 마지막 장면, 안드레아스가 맞이하는 결말은 슬픔 대신 기묘한 평온함을 줍니다.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며, 우리는 모두 잠시 머물다 가는 술꾼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올겨울, 삶의 무게에 지친 우리에게 영화는 독한 술 대신 따뜻한 수프 한 그릇 같은 온기를 전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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