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호수공원을 달렸다. 새벽4시, 으스름하고 한적한 그시간을 너는 좋아했지.
두바퀴째 벌써 손등이 빨갛게 되는걸 보니 새벽런닝을 그만 해야할 계절이 다가오나보다.
바람이 차서 인지, 노래가사 때문인지 괜히 눈물이난다. 눈물을 훔치려고 잠시 걸음을 멈추는 너.
주말마다 같은시간에 달리다보니 반대편에 오는 몇몇은 이미 낯이익다. 종종 목례를 건넨다. 반대방향으로 달리는 이들을 그렇게 만나고 또 만난다.
이상하게도 너는 그들의 얼굴을 조금씩 기억하고 있었다. 늘 회색 모자를 쓰는 여자, 발목까지 오는 바람막이를 입고 빠르게 걷는 남자, 작은 흰 개에게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 서로 이름도 모르면서 주말 새벽이면 같은 자리에서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한 바퀴에 두 번쯤 마주치고, 어떤 날은 세 번.
말 대신 고개를 조금 숙인다.
너는 그런 관계가 좋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
어쩌면 사람 사이에는 그 정도의 거리만으로 충분한 순간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중에서도 네가 가장 자주 마주치는 사람은 회색 모자를 쓴 여자였다.
그녀는 언제나 너와 반대방향으로 달렸다. 호수의 동쪽 끝에서 한 번, 나무데크를 지나 다시 한 번. 네가 평소보다 조금 빨리 달린 날에는 다리 근처에서 한 번 더 마주치기도 했다. 처음에는 서로 모르는 척 지나쳤고, 어느 순간부터 그녀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너도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그게 전부였다.
그러다 어느 토요일,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별 생각은 없었다. 사람에게는 늦잠을 자는 날도 있고, 비가 오지도 않았는데 괜히 뛰기 싫은 날도 있을테니까.
그런데 다음주에도 그녀는 없었다. 너는 호수를 한 바퀴 돌고, 두 바퀴째부터 조금 이상한 마음으로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회색 모자가 나타날 만한 곳을 미리 살폈다. 없었다. 그 다음주에도.
그제야 너는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전화번호는커녕 목소리조차 들어본 적 없는 사람인데. 아픈 건지, 이사를 간 건지, 달리기를 그만둔 건지, 아니면 그저 시간을 바꾼 것인지 알 방법이 없었다.
그 여자가 늘 나타나던 자리를 지나며 문득 생각했다.
사람이 사라지는 일은 생각보다 조용하구나.
어릴 때는 이별에는 반드시 마지막 장면이 있는 줄 알았다.
누군가 등을 돌리고, 문이 닫히고, 마지막 말이 남는 것. 마지막임을 알아볼 수 있는 표정쯤은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살아보니 대부분의 관계에는 그런 장면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가 마지막인 줄 모르고 끝나는 일이 더 많았다.
다음에 보자고 말했던 사람, 조만간 밥이나 먹자던 친구, 한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 불렀는데 이제는 몇년째 입밖에 내지 않는 이름. 마지막인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오래 봐둘걸 싶은 얼굴도 있었고, 마지막인 줄 몰랐기에 견딜 수 있었던 얼굴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싸워서 사라졌고, 어떤 사람은 사랑해서 사라졌다. 아무일도 없었는데 사라진 사람도 있었다. 사는 곳이 달라지고, 하는 일이 달라지고, 누군가에게는 아이가 생겼고 누군가의 마음은 변했다. 그렇게 어느날부터 서로의 하루에 등장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게 전부였다.
너는 계속 달렸다. 호수는 둥글었다. 분명 앞으로 가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같은 곳으로 돌아왔다. 같은 나무와 같은 벤치, 같은 가로등을 몇번씩 지나쳤다.
끝난 줄 알았던 마음을 몇년 뒤 다시 지나기도 하고,
다 잊었다고 생각한 시절의 장소 앞에 어느날 다시 서게 되는 것처럼.
그렇다고 정말 같은 자리는 아니었다. 나무의 잎은 전보다 줄어 있었고, 새벽은 늦게 밝아왔으며, 무엇보다 너는 몇해 전의 네가 아니었다.
그 순간 오래전 함께 있었던 몇몇 사람이 떠올랐다. 같은 온라인 게임을 다녔던 사람,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눴던 사람, 한때는 평생 서로의 안부를 알고 지낼 줄 알았던 사람까지.
그들과 너는 한동안 같은 길 위에 있었다. 그래서 같은 곳으로 가는 줄 알았다. 같은 길을 걷는 것과 같은 방향으로 가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는 걸, 너는 꽤 늦게 알았다.
누군가는 먼저 방향을 틀었고, 어떤 때에는 네가 먼저 방향을 틀었다. 서로를 원망했던 시간도 있었다. 왜 나와 같은 곳으로 오지 않느냐고, 왜 조금만 더 기다려주지 않았느냐고.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들은 그저 자기 방향으로 가고 있었던 것뿐인지도 몰랐다. 너 역시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문득 알게 된다. 누군가의 이야기 속에서는 너도 갑자기 사라진 사람이었을 거라는 걸.
답장을 미루다 끝내 하지 않은 사람, 다음에 보자고 말해놓고 다시 만나지 않은 사람, 어느 순간 마음을 거둔 사람, 다른 쪽으로 걸어가버린 사람.
아마도 그녀는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 다음주에 아무렇지 않게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래도 너는 이유를 묻지 않을 것이다. 오랜만이네요, 같은 인사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지나갈 것이다. 너는 이제 그것으로 충분할 것 같았다.
모든 사람을 붙잡을 필요는 없었고, 모든 사라짐에 이유를 붙일 필요도 없었다.
한동안 같은 시간, 같은 장소를 지나갔다는 것. 서로의 존재를 잠깐 알아보았다는 것. 그것만으로 끝나는 관계도 있을 것이다.
이어폰 속 노래가 끝나고 다른 노래가 시작됐다. 어느새 하늘 가장자리가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네 손등은 여전히 빨갰다. 조금 있으면 네가 달리는 시간도 달라질 것이다. 그러면 흰 개를 데리고 걷던 사람도, 긴 바람막이를 입은 남자도, 그들을 바라보던 너도 더는 이 시간의 호수에서 만나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너 역시 어느날 갑자기 나오지 않는 사람이 될 것이다.
너는 그 사실이 조금 슬펐고, 이상하게도 조금 안심이 됐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궤도에 잠시 들어왔다가 나간다. 때로는 나란히, 때로는 반대방향으로.
그리고 아주 가끔 같은 장소를 오래 돌았다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같은 방향의 사람이라고 착각한다.
너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반대편에서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얼굴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누구인지 확인하려고 속도를 늦추지는 않았다.
그저 넌, 너의 방향으로 계속 달릴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