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는 곳, 환기미술관
가끔 애매하게 여유로운 시간, 그렇다고 마냥 흘려보내고 싶지 않은 시간이 날 때. 그럴 때 멀지 않은 곳에 나만의 장소 하나쯤 마음에 품고 있다면 괜스레 마음이 넉넉해진다.
서울 부암동 주민센터에서 창의문 삼거리 방향으로 걸어 올라가다 동양방앗간 왼편으로 난 좁은 골목길을 따라 90m 정도 내려가면 만날 수 있는 곳. '환기미술관'은 그 리스트에 올려둘 만하다.
실은, 환기미술관이 먼저가 아니었다. 그곳으로 나를 이끈 것은 정현주 작가의 바카라,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2015, 도서출판 예경)였다. 영화 <오디세이>를 더 잘 이해하려고 전 이야기인 <트로이>를 먼저 보는 것처럼, 바카라이 나를 그들의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 장소로 이끌었다.
미술관에 가기 전날, 예비 미술학도인 아들에게 김환기를 아느냐는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 아들은 당연히 알지만, 별로 좋아하진 않다고 했다. 이유를 들으니 이해가 되었다.
"너무 단순해."
입시 미술을 위해 복잡해 보이는 그림을 그리는 아이 입장에선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점 하나에 삼라만상을, 윤회까지 담아내는 대작가의 의도를 10대 아이가 어찌 이해할 수 있으리.
미술관으로 향한 날. 우산을 쓰기엔 애매해서 접었더니, 기다렸다는 듯 공기 중 물방울이 안경에 다닥다닥 달라붙어 뿌옇게 만드는, 그런 습기 가득한 날씨였다. 그래서인지 관람객이 드물어, 오히려 미술관 관람엔 최적인 날.
'1992년 11월, 수화 김환기 선생을 기리고 현대 미술의 발전에 공헌하고자 건축가 우규승의 설계로 개관하였습니다.'
미술관 안내 팸플릿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지만, 남편의 예술 작품이 시대와 영원히 호흡하길 바란 아내 김향안(본명 변동림) 여사의 의지와 열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미술관 곳곳에 김향안 여사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한다. 미술관은 김환기 화백의 작품이 영원히 살아 숨 쉬는 공간이자, 생전에 서로 그렇게 대화가 많았다는 이 부부의 끊임없는 대화가 이어지는 곳이겠다.
그들이 머물렀던 서울과 파리, 뉴욕의 삶이 어떤 식으로 화백의 작품에 표현되었을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화백이 파리에서 매료되었다던 물감, '과슈(불투명 수채화물감)'의 질감은 어떠한지도.
김환기 화백은 백자를 좋아해서 백자를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다고 한다. 어둠이 내리면 창문에 비친 달빛에 백자가 빚어내는 오묘한 빛을 그렇게 사랑했었다고. 그래서인지 그의 전기 작품에는 백자와 달항아리가 자주 등장한다. 특히 파리에 머물며 고국을 그리워하던 시기엔 더욱.
6.25 전쟁 후 삶을 복구하느라 힘겨웠을 고국의 현실과 더 높은 이상 실현 사이에서 지성인의 고뇌가 어찌 없었을까. 고국을 그리워하며 백자를 그리던 그 마음이, 어쩌면 이상과 현실 사이의 고뇌와 맞닿아 있었던 건 아닐까. 절제된 형태와 색으로 한국의 미와 정서를 표현하여 프랑스 미술계에 파동을 일으킨 것은 어쩌면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애국이었을지도 모른다.
파리에서의 경험은 훗날 미국 뉴욕에서 전업 화가로서 전념하는 발판을 마련한 계기였다. 그러나 이 발판은 김환기 화백이 파리로 건너가기 1년 전, 먼저 홀홀 단신으로 파리로 건너가 프랑스어를 배우고 미술학교에서 공부하며 파리 화랑을 미리 섭렵해 둔 당찬 신여성, 김향안의 내조 없인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김향안이 김환기의 입과 귀가 되어주지 못했다면, 고국에 글을 보내고 받는 원고료 등으로 생계를 바카라임지지 못했다면 어찌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미술관 본관 1층과 2층엔 화백이 달항아리, 산, 달 등을 그린 초기 및 중기 작품들과 드로잉이나 소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3층에서야 드디어 김환기 화백의 뉴욕시대를 대표하는 대형 '전면점화'를 만날 수 있는데, 높은 층고, 자연광, 은은한 조명이 어우러져 김환기 화백의 거대한 작품들을 고요히 감상하기에 알맞다.
김환기의 거대한 전면점화 작품 앞에 서면, 뭐랄까. 분명 평면에 그린 그림인데 '움직'인다. 수만 개의 점과 점을 둘러싼 사각의 형태와 색의 농도가 달라서일까. 서로를 밀고 당기는 듯, 유기적으로 활동하는 듯하다.
분명 유채인데 캔버스 곳곳의 번짐은 수묵화 같다. 신기해서 검색해 보니 유화에 기름을 많이 섞어 수묵화의 번짐 효과를 실현한 것이란다. 그렇게 만들어진 거대한 푸른 공간은 살아 움직이는 우주, 끝없이 팽창하는 우주 같다.
- 점을 찍고 테두리를 그리는 일을 수 만 번 반복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 작품을 구상할 때 아내 김향안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는데, 전면점화도 그렇게 탄생한 것일까.
- 당대로서는 드물게 지성과 재능을 두루 갖췄던 김향안은 과연 화가 김환기의 아내로서의 삶에 만족했을까.
이는 김환기 화백과 김향안 여사의 삶과 열정이 응집된 곳에서 들었던 의문들이다. 다음 방문 때는 좀 더 생각을 넓게 채워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