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들

아침 일곱 시, 아파트 앞에 서서 습관처럼 콜을 부르고 택시 뒷자리에 몸을 구겨 넣었다. 전날에도 온종일 강의를 했고 오늘 아침에도 어김없이 강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피곤했으므로 자리에 눕다시피 시트에 등을 붙이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제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택시를 탈 때마다 차분함을 기대한다. 어디 가세요, 출근하세요, 요즘 정치가 어떻고 날씨가 지나치게 덥다느니, 이런 시답잖은 말들이 앞 좌석에서 날아오기 시작하면 눈을 감고 있다가도 다시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워야 한다. 대답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그러니 거울에 비친 기사님의 눈을 한번 살피고 짧게 의식 없이 대답하게 되는데, 대화는 끝나지 않고 다음 질문으로 이어진다.


오늘은 달랐다. 차는 한 시간 가까이 도로 위를 기분 좋게 달렸고 기사님은 운전에만 열중했다. 나도 뒷자리에서 인간이 아닌, 수하물처럼 편안하게 늘어져 있었다. 이 정도면 훌륭했다. 아무런 행동이 없어도 저절로 완성되는 서비스도 세상엔 있을 것이다.


현장에는 예상보다 일찍 도착했다. 채 여덟 시가 되지 않았다. 안내 데스크에서 신분을 확인하고 보안 절차를 밟았다. 신분증을 맡기고 휴대전화에는 보안 어플을 깔았다. 강의는 아홉 시부터니 한 시간 이상이 남은 터였다.


기다리다, 담당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직 출근하지 않았다는 답장이 돌아왔다. 잠시 휴대전화 화면을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스레드에 접속했다, 단톡방에 들어갔다 나오니 5분이 지나갔다.


강의를 다니다 보면 한 시간 정도 일찍 도착하는 것이 습관이 됐다. 이것은 강사로서의 의지, 아니 작은 신념이다. 현장에는 여러 변수가 상수처럼 터진다. 현장의 컴퓨터가 아닌 내 맥북을 사용하고 프로젝터에 연결 테스트를 해보고 인터넷 연결까지 확인해야 한다. 교육생 PC에 필요한 프로그램이 설치되어 있는지도 살핀다. 어제 되던 것이 오늘 갑자기 작동이 되지 않는 것은 컴퓨터가 인간에게 베푸는 오래된 불친절한 전통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오늘은 강사가 담당자보다 먼저 현장에 도착했다. 뭐, 그럴 수도 있다. 강의는 한 시간 후에 천천히 시작될 것이다. 2층 교육장에는 커다란 모니터가 열을 맞추고 놓여 있었다. 너무 큰 바람에 앞에 앉은 사람들의 얼굴이 절반쯤 가려질 것 같았다. 화면 위로 이마가 보였다가 사라지고, 가끔 눈 두 개가 겨우 보일락 말락 할 것 같았다. 내가 앞에서 설명해도 누가 따라오는지 알 수 있을까 싶었다.


평소 기업 교육에서는 보조 강사가 분주하게 돌아다닌다. 누군가 화면 앞에서 멈추면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고, 설치가 안 되면 즉시 도와준다. 강사는 사람들 얼굴을 보고 보조 강사는 뒤에서 사람들의 모니터를 관찰한다.


오늘은 뒤를 봐주는 사람이 없었다. 담당자는 강의 시작 전 물 두 병과 차가운 음료수 한 병을 바카라상 위에 올려놓더니 곧 외부 일정이 있다며 현장에서 사라졌다. 9시 이후로 담당자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른 직원 한 명이 잠시 들어와 컴퓨터 몇 대를 만진 뒤 그 역시 문 밖으로 이내 사라졌다.


바카라상 위에는 물 두 병과 방금 비운 빈 병이 남았다. 강의가 시작되고 준비한 실습 프로그램을 하나씩 덜어냈다. 무료 계정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기능이 있었고, 설치하려던 데스크톱 프로그램은 보안 정바카라이라는 장벽에 가로막혔다. 미리 준비해 온 순서를 머릿속에서 지우고 남은 것으로 다시 조립했다. 강의를 오래 하다 보면 이런 일에는 제법 익숙해진다. 안 되면 다른 프로그램을 꺼내오면 된다. 다른 예비 프로그램도 안 되면 쇼라도 하면 된다. 그것마저 안 되면 그때는 집에 가야겠지만.


맨 앞자리에는 젊은 교육생 한 명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바카라상 아래쪽에서 스마트폰 화면이 손가락 사이로 이리저리 바쁘게 미끄러졌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다. 내가 앞으로 걸어가도 화면은 사라지지 않았고, 설명하다가 대놓고 그에게 눈을 쏘아 보내도 손가락은 멈추지 않았다.


한 번은 그쪽만 꽤 오래 바라봤다. 한 번 내려간 고개는 솟아오르지 않았다. 혀끝까지 올라온 문장을 다시 삼켰다.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앞에 놓인 빈 생수병을 손가락으로 찌끄러뜨렸다. 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강의는 계속됐다. 점심시간이 되자 교육생들이 썰물처럼 자리에서 빠져나갔다. 사람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커다란 모니터들만 줄 맞춰 남았다. 나도 노트북에서 HDMI 케이블을 빼냈다. 그런데 난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십 분쯤 멀거니 앉아 있었다. 남은 시간은 1시간 하고도 10분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담당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에게 강의를 소개해 준 사람도 역시 보이지 않았다. 어제는 함께 식사를 했지만 오늘은 휴대전화도 조용했다. 결국 담당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점심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잠시 뒤 답이 왔다. 밖에서 직접 먹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미안하다는 문장이 뒤에 슬그머니 따라붙었다.


주머니에서 지갑을 만지작거렸다. 건물 밖으로 나가 뙤약볕 밑의 보도블록을 한참 동안 걸었다. 아직 여름은 물러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셔츠 안쪽으로 땀이 슬슬 차기 시작했다. 손풍기는 윙윙 펜소리를 내며 시끄럽게 떠들었다. 근처 카페에 들어가 샌드위치 하나와 커피를 주문했다. 창가 자리에 혼자 앉아 포장지를 벗겼다. 샌드위치를 절반쯤 먹다가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다시 화면을 뒤집어놓고 남은 절반을 먹었다.


오후 강의가 이어졌다. 맨 앞자리에서는 다시 스마트폰이 바쁘게 움직였고, 뒤쪽에는 초롱초롱한 눈망울들이 동시에 반짝였다. 나는 앞에서 설명하고 질문을 받고 컴퓨터 사이를 오갔다. 준비해 간 작은 선풍기가 바카라상 한쪽에 잠들어 있었다.


세 시가 조금 넘어 강의가 끝났다. 노트북 전원을 끄고 케이블을 하나씩 뽑았다. HDMI 케이블, 충전기, 마우스, 어댑터. 강의를 시작할 때 펼쳐놓았던 물건들이 다시 가방 안으로 묵묵히 들어갔다. 바카라상 위에는 거의 마시지 않은 생수병 하나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나는 도망치듯 현장을 떠났다.


연말에 한 차례 더 강의를 부탁하고 싶다는 말을 들었다. 강의료는 시간당 X5만 원 정도라고 했다. 예전 같으면 캘린더를 열고 분주하게 일정을 예약했을 것이다. 그날은 노트북을 먼저 닫았다. 그리고 귀도 함께 닫고 싶었다.


다른 기관에서는 같은 한 시간에 두세 배를 지급하기도 한다. 물론 금액이 중요한 건 아니다. 한 사람을 불러놓고 그 사람이 어디서 밥을 먹어야 하는지조차 매뉴얼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면, 어쩌면 그런 하루는 아예 삭제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가방 지퍼를 닫았다. 아침에 나를 태워준 택시기사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물론 그의 얼굴은 내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사람은 한 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오늘 만난 사람 가운데 그 사람이 제일 친절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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