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우스의 법과 공동선의 세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2026)

by심우일

서양 문명의 고전 <오디세이>는 대중들에게 익히 알려져 있듯이 트로이 전쟁을 끝내고 이타카로 돌아가는 오디세우스의 모험을 다룬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는 영리한 전쟁 영웅 오디세우스가 트로이를 멸망시키고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분노를 사서 바다를 표류하다가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의 왕국을 탐내는 무리를 멸한다는 이야기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감독은 이러한 서사시 <오디세이>를 현대적 관점에서 다시 읽어내고 있다. 우리가 이 작품에서 중요하게 보아야 할 지점은 수천 년 동안 영웅의 모험담으로 읽혀온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를 오늘날의 관점에서 어떻게 재해석하느냐이다.


영화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열쇠는 바로 제우스의 법이다. 제우스의 법은 간단히 말해서 환대의 율법이다. 자신의 집을 방문한 이방인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잠자리를 마련해주고, 그가 다시 길을 떠날 수 있도록 보호하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하면 자원이 풍족하지 않고 가도가 정리되지 않은 세상에서 제우스의 법은 서로 알지 못하는 인간들이 하나의 세계 안에서 서로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공동체적 율법인 것이다.

이 제우스의 법은 영화 <오디세이>에서 단순한 불문율이 아니라 문명과 비문명을 가르는 기준이다. 영화에서 페넬로페와 그의 아들 텔레마코스 사이의 대화에서 드러나듯 바다 밖의 이방인들에 의해 제우스의 법이 무너지는 상황을 그들은 문명의 파괴로 여긴다. 왜냐하면 문명이란 야만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규칙을 지닌 상태이기 때문이다. 즉, 문명은 단순히 강한 군대와 물질의 힘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지켜져야 하는 최소한의 신뢰를 통해 형성되는 것임을 영화는 암시한다.


이러한 영화의 세계관을 이해하면, 이 작품에서 오디세우스가 계속 내적으로 괴로워하는 이유를 알게 된다. 오디세우스가 고통받는 이유는 문명의 금기인 제우스의 법을 어겼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영웅담에서 오디세우스의 목마는 그의 지혜를 증명하는 사건이지만, 영화는 그의 지혜가 바로 공동체의 금기를 어긴 행위로 다룬다. 트로이 목마 작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전쟁의 종료와 함께 신에게 바치는 화해의 선물을 내놓는다는 상호 신뢰 행위를 전제하고, 오디세우스는 그 상호 신뢰를 전쟁의 기술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오디세우스는 문명이 만들어놓은 규칙을 파괴함으로써 승리하고, 이 폭력은 적만을 향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시논이다. 오디세우스는 시논에게 목마가 그리스인들이 아네테에게 바치는 화해의 선물이라고 트로이인들에게 전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작전의 일부라는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시논은 오디세우스에게 받은 명령을 진실이라고 믿고 트로이인들에게 전달하고, 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영화의 중반부에 유령이 되어 나타난 시몬이 오디세우스에게 자신에게 왜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느냐고 비난하는데, 이것은 오디세우수의 목마 작전이 아군과 적과 동시에 속이는 기만임을 잘 보여준다. 승리를 위해 적과 동료의 구별마저 흐려지고 인간이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이러한 오디세우스의 승리가 과연 영광스러운 것일까? 원작에서 <오디세이>는 오디세우스가 고난을 헤치고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왕국을 탐내는 무리들을 숙청하고 왕으로서 질서를 회복하는 영웅 서사이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 영웅의 귀환을 트로이에서 이타카로 귀환하는 공간적인 이동의 과정이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행위의 의미를 이해하는 정신적 여정으로 다룬다.


이를 보여주는 중요한 형식적 특징은 이 영화의 모험담이 칼립소에게 오디세우스가 대화의 형식으로 자신의 기억을 전달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는 제삼자가 오디세우스의 영웅담을 들려주는 방식이 아니라, 청자(칼립소=독자)에게 직접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겪은 경험을 고백하는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가 스크린을 통해 보고 듣는 오디세우스의 모험은 완전히 객관적인 세계의 기록이 아니다. 이 지점에서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기억을 회고하며 그의 고백 속에 등장하는 많은 괴물과 마녀 그리고 신들의 형상은 전쟁 이후 그가 정신적으로 감당하지 못하는 기억과 공포가 취하는 형상으로 읽어낼 수 있다.


이때 신화와 오디세우스가 경험한 전쟁의 트라우마는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오디세우스의 고백 속에서 하나로 겹친다. 즉, 놀란은 원작이 지닌 신화를 제거하는 대신에 신화와 전쟁을 경험한 인간의 기억과 죄바카라감이라는 심리적 층위를 겹쳐놓는 방식을 택한다.


오디세우스가 바다를 떠도는 것은 포세이돈이 그의 귀향을 막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타카에 도착하는 일은 자신이 누구였으며 무엇을 했는지 인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칼립소가 내어주는 망각의 꽃은 중요하다. 망각은 고통에서 벗어나는 쉬운 방법이며, 기억하지 않으면 죄바카라감도 없다. 하지만 오디세우스는 칼립소가 내어주는 망각의 꽃을 거부하고 제우스의 법을 어긴 전쟁 범죄가 자신의 바카라임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인정했을 때 비로소 그는 이타카로 돌아오게 된다.


이제 귀향은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의 문제가 된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과오를 인정함으로써 고향으로 돌아갈 자격을 얻는다. 바다에서의 표류가 자신이 저지른 반문명적인 전쟁 범죄에서 벗어나기 위한 정신적 방황이었다면, 귀향은 그 죄에 대한 바카라임과 인정을 뜻한다.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온 오디세우스가 페넬로페의 시험을 통과하기 전,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순간 영화는 아테네 신상의 목이 잘려 나가는 장면과 아무런 죄가 없는 평범한 트로이 처녀의 목이 그리스 병사들에게 잘려 나가는 장면이 교차 편집된다.

이러한 영화적 이미지의 연결은 이 작품에서 반복해 언급되는 ‘인간으로 변장한 신’이라는 은유와 연결되며 핵심을 관통한다. 영화는 오디세우스 주변을 떠돌던 아테네 신의 얼굴과 희생자의 얼굴을 하나의 화면 위에 겹쳐놓음으로써 그를 보호하고 전쟁의 영광으로 이끌었다고 믿었던 신의 얼굴을, 아이러니하게 망자의 얼굴로 전환한다. 이를 통해 신의 명령이나 운명이라는 말로 정당화할 수 없는 오디세우스의 윤리적 바카라임을 부각하며 그가 파멸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화 <오디세이>에서 오디세우스가 귀향 후 보여주는 마지막 전투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한편으로는 제우스 법에 기대어 주인에 베푸는 환대를 즐기며, 도리어 주인을 모욕하던 이타카의 불한당들을 제거함으로써 무너진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서진 제우스의 법을 바로 세우며 자신을 처벌하는 자기 징벌의 성격을 지닌다. 이런 점에서 원전의 <오디세이>가 자신의 왕궁을 탐하던 무리를 징벌하고, 왕으로서 권위를 회복하는 영웅 서사라면, 놀란의 <오디세이>는 전쟁의 트라우마와 자신의 저지른 범죄에 대한 바카라임을 받아들인 윤리적 주체의 귀환이다.


이제 오디세우스는 부끄러움을 아는 주체가 된다. 이때 부끄러움은 후회가 아니다. 후회는 사건에서 도망치고자 하는 마음이라면, 부끄러움은 바카라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을 뜻한다. 시대와 신의 명령을 근거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행위를 피하고, 자신의 행위에 바카라임을 지는 주체가 될 때 비로소 그는 트로이 전쟁이라는 비극적 사건을 노래의 형식으로 역사에 새겨넣는 주체가 된다.


이 지점에서 <오디세이>는 놀란의 이전의 작품들과 만난다. 그의 전작들 <덩케르트>(2017)가 거대한 전쟁의 승패보다 집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생존 본능에 대해 말하고, <오펜하이머>(2023)가 인류문명의 지적 성취가 오히려 파괴의 기술이 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며, <배트맨>(2005~2012)연작은 질서를 지킨다는 명분 아래 폭력이 어디까지 허용되는지 질문했다.


이러한 그의 문제의식은 이번 작품 <오디세이>로 집약이 되고 있는데, 과연 승리의 기억이 진정으로 영광스러운 사실인지 되묻는 방식을 취한다. 수천 년 동안 이어진 승리의 기억을 놀란은 의심하며, 그 승리의 기억이 감추고 있는 폭력의 기억을 들춰낸다. 목적을 위해 사람을 수단으로 이용하고, 승리를 위해 신뢰를 기반으로 한 공동체의 율법을 파괴하며, 영웅의 업적은 상호 신뢰를 파괴함으로써 문명을 야만으로 떨어뜨린 역사로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놀란은 오디세이라는 신화적인 영광의 기억을 오히려 뒤집어 윤리적 바카라임으로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 주체의 서사로 다시 읽는다.


과연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이 오디세이에서 보여주는 세계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인류는 풍요로운 물질문명을 이룩했지만, 모든 인간의 유산을 교환가치로 환산하는 세계를 살고 있다. 전쟁으로 인한 죽음이 세계 곳곳에 일어나고 있어도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고 있는 현실이 과연 오디세우스가 마주한 현실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나? 이런 점에서 영화의 모티프가 되는 제우스의 법은 단순한 과거의 풍습이 아니라 문명이 문명으로 남기 위한 최소의 윤리, 즉 공동선의 다른 이름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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