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변명
난파선에서 떨어진 나무조각처럼 해변으로 떠밀려 무작정 순례길에 들어섰다.
도착한 해변에는 쓰디쓴 파도가 계속 나무조각을 해변으로 떠미는데, 그곳은 결국 도달해야 할 도착지가 아니므로 떠나야 했다.
세상일이 다 그렇지만, 순례길 초입부터 뜻하지 않은 일이 계속 발생하고 있다.
예정에 없던 파리에서의 1박, 그리고,
전쟁통 피난길처럼 떠나온 이곳에 나를 찾아온 지인의 부고는 내가 온전히 떠나지 못한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듣고 싶지 않고 외면하고만 싶은 그 소식에 당황하여 불쑥 파리의 야경 속으로 뛰어들었던 지난밤 기억이 벌써 멀게 느껴진다.
그에 대한 기억으로 가득 찬 순간들이 파리의 야경으로 채워져 희미해진 것만 같다.
그는 길을 떠났고 나는 나의 길을 떠날 것인데, 내가 가는 길에서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낯선 파리의 야경이었지만 밤은 어디서나 동일한 질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파리도 다르지 않았다.
낮게 깔려 길바닥까지 내려앉은 어둠을 밤을 밝히는 조명들이 걷어내려 했지만, 그것들은 검은 망토 위에 수놓은 점처럼 반짝일 뿐이었다.
나는 지금 숙소에서 지난밤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 내고 오늘부터 걷게 될 여정을 생각하고 있다.
꼼꼼하게 일정을 잡으려다, 어차피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사람 일이라 집어 들었던 다이어리를 접어 침대 옆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제 가야지, 출발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