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바오루이 감독의 림보(Limbo)와 엑시던트(Accident)
홍콩영화에서 정바오루이(鄭保瑞, Soi Cheang)의 도시는 좀처럼 사람을 보호하지 않는다. 골목과 도로, 낡은 건물과 지하 공간은 인물을 품는 생활의 터전이라기보다 그들을 압박하는 장치에 가깝다. 그 안에서 사람은 움직일수록 안전해지는 대신 조금씩 닳아간다.
2009년의 <Accident(意外)>와 2021년의 <Limbo(智齒)>는 그 도시를 전혀 다른 질감으로 보여준다. <Accident>의 홍콩이 정교하게 맞물리는 기계라면 <Limbo>의 홍콩은 비와 오물, 쓰레기에 잠긴 거대한 상처처럼 보인다. 전자는 우연을 조작하는 청부살인자를 좇는 스릴러이고, 후자는 연쇄살인 사건을 추적하는 범죄 누아르다. 하나는 차갑게 계산되고 다른 하나는 거의 육체적으로 질척거린다.
그러나 두 영화에서 폭력이 시작되는 지점은 의외로 가깝다. 인간이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과 눈앞의 타인을 하나의 확신으로 설명하려 할 때이다.
<Accident>의 브레인(고천락)은 우연을 믿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연을 믿어서는 자신의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와 동료들은 살인을 저지르되 살인처럼 보이지 않게 만든다. 총이나 칼 대신 교통과 날씨, 사물의 위치와 사람의 동선을 조합해 한 사람의 죽음을 사고로 위장한다. 영화가 보여주는 흥미로운 지점은 범죄의 흔적을 지운다는 데 있지 않다. 브레인이 제거하려는 것은 사건에 개입한 인간의 의도이다.
사람은 죽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아무도 그를 죽이지 않았다.
그에게 완전범죄란 범인을 숨기는 기술보다 세계를 조작하는 기술에 가깝다. 여러 개의 우연을 정확한 순서로 배치하면 필연적인 죽음이 만들어진다. 영화 초반의 살인 장면에서 사람과 차량, 신호와 사물은 제자리를 기다리는 부품처럼 움직인다. 브레인은 그 모든 요소가 정확한 순간에 맞물릴 때까지 기다린다. 그러던 그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사고가 닥친다. 동료가 죽고 자신 역시 위험에 빠지자 브레인의 사고는 자신이 평생 사용해 온 방식으로 되돌아간다. 이것도 누군가 설계한 것은 아닐까.
이 순간 이 영화는 완전범죄의 묘미를 보여주는 영화에서 편집증의 작동 방식을 들여다보는 영화로 방향을 튼다. 청부살인자가 자신의 수법으로 공격받을지 모른다는 설정 자체는 장르적으로 낯설지 않다. 이 영화가 더 흥미로운 이유는 브레인의 의심이 단순한 망상으로 치부되기 어렵다는 데 있다. 그는 실제로 평생 우연 뒤에 의도를 숨겨왔다. 자동차 사고도, 낙하물도, 사람 사이의 사소한 충돌도 그의 손에서는 살인의 일부가 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이 사고를 보면 그 피해를 보지만 브레인은 그 안의 설계를 본다.
직업이 그의 세계관이 된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비극은 의심이 지나치게 많다는 데 있지 않다. 자신의 경험으로 설명되지 않는 세계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 있다. 브레인은 통제할 수 없는 사건을 만나자 원인이 없을 가능성을 견디는 대신 원인을 만들어낸다. 자신이 조종해 온 세계에서는 모든 결과 앞에 설계자가 있었으므로, 자신에게 닥친 결과에도 설계자가 있어야 한다.
정바오루이 감독은 이 변화를 도시의 모습과 함께 밀어붙인다. 초반의 홍콩에서는 공간의 질서가 중요하다. 차량의 방향, 신호등, 건물, 창문, 전선이 서로 연결되면서 도시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장치처럼 작동한다. 브레인의 의심이 깊어진 뒤에도 도시는 달라지지 않는다. 달라진 것은 그가 사물을 연결하는 방식이다. 맞은편 창문에 서 있는 사람, 거리를 지나가는 차량, 켜져 있는 불빛 하나가 갑자기 자신에게 보내는 신호처럼 보인다. 처음에는 브레인이 도시의 인과관계를 설계했다. 이제 인과관계가 그를 포위한다.
관객 역시 그 함정에서 자유롭지 않다. 영화는 이미 초반에 평범한 우연이 치밀한 살인일 수 있음을 가르쳐놓았다. 그 때문에 브레인이 누군가를 의심하기 시작할 때 관객도 같은 방식으로 화면을 읽는다. 스쳐 지나간 사람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아무렇지 않은 사건의 배후를 찾게 된다. 브레인의 편집증은 인물의 심리 상태에 머물지 않고 영화를 보는 방법으로 전염된다.
고천락 배우는 그 과정을 과장하지 않는다. 초반의 무표정과 후반의 무표정 사이에 큰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도, 그가 사람을 바라보는 시간과 시선이 머무는 위치가 달라지면서 얼굴의 의미가 변한다. 처음에는 위험을 발견하던 관찰력이 뒤로 갈수록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위험을 생산한다. 브레인을 무너뜨리는 것은 능력의 부족이 아니라 지나치게 완성된 능력이다.
제목 ‘의외(意外)’도 이 역설과 맞물린다. 그는 평생 뜻밖의 일을 제작해 온 사람이다. 그러나 가짜 우연을 너무 오래 만들어온 나머지 진짜 우연이 존재할 가능성을 잃어버린다. 우연을 통제하는 기술이 마침내 우연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파괴한다.
여기에는 죄바카라감도 엷게 스며 있다. 브레인은 과거에도 사고로 아내를 잃었고, 영화는 그 기억을 현재의 불안과 겹쳐놓는다.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만들어온 죽음과 자신에게 닥치는 불행이 완전히 무관하다고 단정하기 어려워지는 순간, 의심은 더욱 강해진다. 다만 감독은 이를 단순한 업보의 이야기로 봉합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악행에 대한 초월적인 처벌이 아니라, 설명되지 않는 불행 앞에서 한 인간이 어떤 인과관계를 선택하는가이다.
12년 뒤 작품 <Limbo>에서 정바오루이 감독은 인과관계의 문제를 머리에서 몸으로 옮긴다.
<Accident>의 홍콩에서 중요한 것이 배치와 연결이었다면, <Limbo>에서는 표면과 질감이 먼저 들어온다. 쓰레기봉투와 폐가구, 고철과 폐차, 젖은 콘크리트와 검은 물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좁은 골목에 비가 쏟아지면 도시가 씻겨나가는 대신 안에 감춰두었던 것들을 토해내는 것처럼 보인다.
정조강(Cheng Siu-keung)의 촬영은 이 공간을 흑백으로 밀어붙인다. 흑백의 효과를 선과 악의 모호함 같은 상징으로 곧바로 환원하기보다는 화면의 물질성에서 보는 편이 흥미롭다. 색이 사라지면서 젖은 철판, 쓰레기봉투, 피부의 상처, 번들거리는 물과 콘크리트의 질감이 더 전면으로 나온다. 홍콩이라는 익숙한 도시의 색채도 함께 지워진다. 남는 것은 현실의 도시이면서 악몽의 장소이기도 한 회색의 미로이다.
이곳에서는 버려진 물건과 버려진 사람이 같은 자리에 놓인다.
그 중심에 왕타오(류아슬)가 있다. 왕타오는 과거 음주운전 사고로 복역한 인물이다. 이 설정에서 중요한 것은 왕타오가 결백하지 않다는 점이다. 영화는 그녀의 과거를 지워 관객의 동정을 얻는 쉬운 길을 택하지 않는다. 그녀는 분명 돌이킬 수 없는 일을 했다. 법적인 처벌을 받았다고 해서 잔 거(임가동)가 겪은 상실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형벌이 끝난 뒤에도 사람이 영원히 자신이 저지른 한 사건으로만 존재해야 하는지는 별개의 질문이다.
잔 거(임가동)가 왕타오(류아슬)를 다시 만나는 순간 그는 현재의 그녀보다 과거의 사고를 먼저 본다. 왕타오는 눈앞에 살아 있는 사람이지만 잔 거에게는 자신의 삶을 파괴한 사건의 흔적이다. 그의 분노에는 명백한 이유가 있다. 영화는 그 이유를 부정하지 않는다. 동시에 그 상처가 왕타오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자동으로 정당화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는다.
여기서 두 영화의 인물이 정확히 갈린다.
브레인은 세상에서 우연을 지워버린다.
잔 거는 왕타오에게서 현재를 지워버린다.
브레인에게 모든 사건에는 의도가 있어야 하듯 잔 거에게 왕타오는 과거의 가해자라는 사실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다. 한 사람은 사건을 하나의 인과관계에 가두고, 다른 한 사람은 인간을 하나의 과거에 가둔다.
류아슬의 연기는 그 문제를 말보다 몸으로 보여준다. 왕타오는 죄바카라감을 긴 독백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골목을 뛰고, 쓰레기 위로 넘어지고, 얻어맞고, 다시 일어난다. 잔 거 앞에서는 겁에 질리면서도 쉽게 도망치지 못한다. 그녀에게 살아남으려는 본능과 과거에서 달아나지 않으려는 마음은 자주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Accident>에서 고천락의 얼굴이 중요한 표면이었다면 <Limbo>에서는 류아슬의 몸이 그 역할을 한다.
정바오루이 감독은 왕타오를 좀처럼 깨끗한 곳에 세워두지 않는다. 그녀의 몸은 쓰레기와 빗물, 진흙과 피를 계속 통과한다. 죄바카라감과 속죄가 추상적인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신체가 견뎌야 하는 고통으로 번역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영화의 잔혹함은 비판적인 질문도 피할 수 없다. 왕타오의 육체가 죄와 속죄를 드러내는 영화적 표면이 되는 동시에, 영화가 여성의 몸에 가해지는 고통을 지나치게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녀가 맞고 끌려가고 쓰러지는 장면이 거듭될수록 관객은 그 폭력의 의미뿐 아니라 폭력을 보여주는 방식 자체도 묻게 된다.
이 문제를 인정한다고 해서 왕타오가 단순한 희생자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녀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불편한 이유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가 한 방향으로 고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왕타오는 과거에는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만든 사람이지만 지금은 또 다른 폭력의 대상이다. 잔 거 역시 가족이 입은 피해의 당사자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상처를 왕타오에게 되돌려주는 사람이 된다.
이 영화가 다루는 것은 쉬운 의미에서의 용서라기보다 한 인간의 과거가 그 사람의 현재와 미래를 어디까지 소유할 수 있는가에 가깝다.
도시의 쓰레기 역시 그 질문과 떨어져 있지 않다. 이 영화에서 폐기물은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누아르 장식 그 이상이다. 누군가 사용한 뒤 가치가 없다고 판단해 내다 버린 물건들이 골목을 메운다. 연쇄살인범의 희생자들 또한 비슷한 방식으로 도시의 폐기물 사이에서 발견된다. 그는 외부에서 홍콩으로 침입한 초월적인 악이라기보다 도시가 오랫동안 보지 않았던 것들 사이에 숨어 있는 존재처럼 묘사된다. 쓰레기는 치워도 다시 쌓이고, 비가 내려도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이 감춰둔 과거도 그렇다.
그렇다고 이 영화의 흑백 화면을 곧바로 도덕적 회색지대의 상징으로 읽을 필요는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색이 지워진 자리에 무엇이 남느냐이다. 인물의 얼굴보다 상처가 먼저 보이고, 화려한 홍콩의 야경 대신 물에 젖은 폐기물이 빛난다. 정조강의 촬영과 미술 설계가 결합하면서 이 도시는 실제 홍콩의 지리에서 출발했으면서도 끝없이 이어지는 지옥의 뒷골목처럼 변한다.
그러나 이 두 영화를 함께 놓을 때 더 흥미로운 것은 두 영화의 영상미가 아니라 폭력을 다루는 방식의 변화이다.
<Accident> 속 폭력에는 직접적인 가해자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죽기까지의 과정은 정교하지만 누군가가 손으로 상대를 죽이는 순간은 최대한 지워진다. 폭력은 사물과 시간, 인과관계 사이로 숨어든다. 살인이 성공할수록 살인처럼 보이지 않는다.
<Limbo>에는 그런 은폐가 없다. 맞은 몸은 쓰러지고, 피와 상처가 남는다. 사람은 쓰레기 위를 기고 젖은 골목을 달린다. 폭력의 결과가 화면 밖으로 사라지지 않고 육체 위에 붙어 있다.
<Accident>가 머릿속에서 작동하는 영화라면 <Limbo>는 피부에서 작동한다. 그리고 이 차이가 두 작품 사이의 12년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브레인은 이해할 수 없는 사건 앞에서 자신의 논리를 더 강하게 밀어붙인다. 잔 거는 너무 잘 알고 있는 과거를 놓지 못한다. 브레인은 이유가 없을 가능성을 견디지 못하고, 잔 거는 자신에게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출발점은 다르지만 두 사람 모두 자신의 확신을 현실보다 앞세우는 순간 타인을 파괴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정바오루이 감독의 영화는 흔한 상대주의와도 거리를 둔다. 모든 판단은 틀릴 수 있으니 누구도 바카라임을 묻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Accident>에는 실제 살인이 있고 <Limbo>에는 실제 피해와 바카라임이 있다. 왕타오가 잔 거의 가족에게 일으킨 사고가 그의 상처를 설명한다는 사실과, 그 상처가 왕타오에게 어떤 폭력도 가할 권리를 준다는 주장은 같지 않다.
사실을 아는 것과 그 사실로 한 사람 전체를 판단하는 것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
브레인은 그 간격을 인정하지 못한다. 하나의 사건이 수상하다면 모든 사건이 설계되었을 수 있고, 하나의 단서가 맞아 보이면 나머지 세계도 그 단서를 중심으로 재배열한다. 그 결과 실제보다 자신의 인과관계를 더 믿게 된다.
잔 거도 비슷하다. 왕타오가 과거의 가해자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가 현재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까지 모두 설명하지는 않는다. 잔 거가 끝내 마주해야 하는 것은 과거를 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과거만으로 현재의 인간을 볼 것인가 하는 문제다.
그 차이 때문에 두 영화의 끝에서 남는 감각도 다르다.
<Accident>는 좀처럼 출구를 허락하지 않는다. 브레인은 세계를 통제하려 했지만 마지막에는 자신이 만든 인과관계의 감옥 안에 갇힌다. 우연을 인정하지 못했던 사람에게 가장 잔인한 것은 자신의 확신이 틀렸을 가능성과 마주하는 일이다.
<Limbo>는 훨씬 많은 육체적 고통을 통과하면서도 아주 작은 틈을 남긴다. 일어난 사건은 되돌릴 수 없고, 잃어버린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왕타오가 겪은 고통이 과거의 잘못을 없애주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한 인간을 과거의 한 장면에 영원히 묶어두던 시선이 바뀔 가능성만은 끝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거창한 구원보다 훨씬 작은 변화이다.
폭력을 한 번 더 이어가지 않는 것.
감독이 두 작품에서 보여주는 인간은 쉽게 선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 불행을 만나면 이유를 찾고, 상처를 입으면 바카라임질 사람을 찾는다. 그 과정 자체는 이상하지 않다. 문제는 찾아낸 이유가 세계의 전부라고 믿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Accident>에서 브레인은 우연까지 자신의 논리 안에 넣으려 한다.
<Limbo>에서 잔 거는 타인의 남은 삶까지 자신의 상처 안에 붙들어두려 한다.
둘 모두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확신한다. 그리고 바로 그 확신이 폭력의 문을 연다.
우연도 인간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순간, 사람은 자신이 가장 두려워했던 폭력의 일부가 된다.
정바오루이 鄭保瑞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