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말고
뽀뽀뽀와 야인시대
선풍기 바람이 거실의 열기를 부지런히 밀어내던 6월의 어느 주말이었다. 고양이도 더위에 지쳤는지 바닥에 배를 드러낸 채 누워 있다가, 생각난 듯 앞발을 핥으며 연신 그루밍을 했다. 나는 청소를 하다 말고 바카라장 아래쪽에 오래 꽂혀 있던 앨범 한 권을 꺼냈다. 표지 위에 내려앉은 먼지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리자, 잊고 지냈던 시간들이 얇은 먼지처럼 공중에 떠올랐다.
몇 장을 넘기다 한 사진 앞에서 손이 멈췄다. 유치원 소풍 사진이었다. 사진 속 아이들은 저마다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표정으로 줄을 맞춰 서 있었다. 그때의 햇빛, 눅눅한 풀비린내, 빳빳하게 풀 먹인 옷의 감촉 같은 것들이 이상하게도 손끝에서 먼저 되살아났다. 기억은 머리보다 몸에 더 오래 남는 법인가 보다.
사진의 맨 오른쪽에는 유독 튀는 꼬맹이 하나가 서 있었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혼자 청바지를 입고, 조끼 단추는 풀어헤친 채, 모자챙을 비스듬히 잡고 있었다. 표정도 어쩐지 당돌했다. 단체 사진을 찍으러 온 아이 같기도 하고, 어디 골목을 접수하러 나온 꼬마 두목 같기도 했다.
오래전, 집에 놀러 온 여자친구가 앨범을 보다가 이 사진 앞에서 깔깔 웃은 적이 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아이들은 뽀뽀뽀를 찍고 있는데, 오빠만 야인시대를 찍고 있네.”
그 말이 어찌나 정확했는지, 나는 지금도 이 사진을 볼 때마다 먼저 웃음이 난다. 그런데 사진 뒤에는 나름대로 귀여운 사연이 숨어 있다. 그 시절 나는 또래보다 성장이 빨랐다. 유치원에서 맞춰 준 단체복은 도저히 몸에 들어가지 않았고, 엄마는 하는 수 없이 나에게 튼튼한 청바지를 입혔다. 공식 이름표 대신 동네 세탁소에서 빨간 천을 하트 모양으로 오려 조끼에 달아주기도 했다.
규격에는 맞지 않았지만, 사랑만큼은 넉넉하게 들어간 이름표였다. 반듯한 네모 대신 삐뚤빼뚤한 하트. 같은 옷 대신 혼자만의 청바지. 지금 생각하면 조금 민망하고, 조금 우습고, 또 그만큼 다정하다. 엄마는 어떻게든 나를 그날의 사진 속에 자연스럽게 세워두고 싶었을 것이다. 남들과 똑같지는 않아도, 빠지지 않게. 조금 달라도, 기죽지 않게.
어느새 30여 년 전 일이 된 그 사진을 들여다보는 일은 단순한 추억 놀이만은 아니다. 가끔 나는 지금도 세상의 유니폼이 잘 맞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남들이 자연스럽게 입는 옷을 나만 어색하게 걸치고 있는 것 같고, 정해진 궤도에서 조금 비껴나 청바지를 입은 채 딴청을 피우고 있는 것 같아 머쓱해지기도 한다.
그런데 사진 속 꼬맹이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는다. 단체복을 입지 못했다는 사실 따위는 모르는 얼굴이다. 아니, 알았더라도 별로 개의치 않았을 얼굴이다. 조끼는 풀어헤치고, 모자는 비스듬히 잡고, 자기 몸에 맞는 청바지 안에서 아주 당당하게 서 있다.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나를 조금 든든하게 한다. 조금 삐딱해 보여도 내 몸에 맞는 옷이 결국 가장 편안한 법이다. 남들과 다른 옷을 입었다고 해서 꼭 움츠러들 필요는 없다. 세탁소에서 오려 붙인 하트 이름표처럼, 정식은 아니어도 충분히 따뜻한 방식이 있다.
사진을 다시 앨범에 끼워 넣고 일어나자, 거실의 열기는 여전히 눅진했다. 고양이는 밥그릇 앞에 앉아 나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선풍기 바람에 잠시 어깨를 식힌 뒤, 사료 봉지를 집어 들었다.
오늘도 나는 나만의 청바지를 입고 하루를 건너간다. 가슴 어딘가에는 보이지 않는 커다란 하트 이름표 하나를 꾹 눌러 단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