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바닥을 본 자들에게 허락된 마지막 연민

결혼 이야기

by달빛바람

개요 드라마 미국 137분

개봉 2019년 11월 27일

감독 노아 바움백 Noah Baumbach


​1. Opening 오프닝


이 영화는 뉴욕에 사는 ​부부 찰리와 니콜이 서로의 장점을 말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니콜의 매력은 성가신 상황에서도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재주이다....... 그녀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이다 "


​"찰리의 매력은 굴하지 않는 성격이다....... 뭘 원하는지도 정확히 안다. 확신이 없는 나랑은 정반대다."

​상담가는 서로의 장점을 쓴 글을 읽도록 요청하지만 니콜은 거부하고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며 자리를 뜬다. 이 영화의 감정폭발은 때때로 갑작스럽고 난데없어서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들의 싸움이 그렇듯 차분하다가도 불쑥 가슴 저 밑바닥의 분노나 슬픔이 튀어나와 공격적으로 굴고 만다. 그 이후에는 후회와 한숨의 시간이 찾아온다. 아마도 니콜은 자신이 쓴 찰리의 장점을 보며 감정의 파고를 느꼈을지 모른다. 거기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방어기제를 작동했을 수도 있다.
​그들은 현재 '이혼'을 하려고 한다. 성숙한 성인이라면 그렇듯 점잖고 조용히 헤어지려 애쓴다. 마치 결혼준비처럼 필요한 과정들을 해치우려 한다 전문가와의 상담, 재산분배, 아이의 양육, 거주지 문제 등.


​이 거부 반응은 감정의 미숙함이 아니라, 다가올 싸움의 잔인함을 직감한 인간이 취할 수밖에 없는 본능적 방어이다. 상대의 결함을 찾아내야만 살아남는 이혼 조정이라는 현실 앞에서, 여전히 남아 있는 사랑의 기억을 대면하는 것은 스스로 무장을 해제하는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감독이 이 영화의 제목을 '이혼 이야기'가 아닌 '결혼 이야기'로 명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혼은 결혼의 단순한 파기가 아니다. 그것은 결혼 생활 동안 축적된 모든 가치와 관계의 밀도를 현미경 아래 올려놓고 역추적하는 지독한 과정이다.



​2. 변호사의 등장


​이 영화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건 동료에게 니콜이 변호사를 소개받으면서이다. 니콜은 그저 가벼운 만남으로 여겼을지 모른다. 애초에 변호사 없이 이혼하는데 남편과도 동의했기에. 하지만 누구에게도 못했던 이야기들은 봇물처럼 터져 나왔고 그 안엔 변호사가 덥석 물 좋은 먹잇감도 있었다.


​우리는 타인의 만남보다 타인의 이별에 더욱더 관심을 갖는다. 어떻게 만나 사랑에 빠졌는지 물어보면 뭔가 유치한 것 같아도 어떻게 혼자가 되었는지 질문하면 뭔가 어른스럽고 성숙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모든 사건은 만남부터 이별까지 마치 하나의 그림처럼 연결되어 있다. 어떻게 헤어지게 되었나? 왜 헤어졌을까? 니콜이 변호사에게 찰리와의 첫 만남부터 얘기하는 것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어쩌면 이 영화가 제목을 '이혼' 아닌 '결혼'으로 설정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세련되고 사려 깊은 변호사의 상담실 안에서, 니콜이 쏟아내는 과거의 기억들은 더 이상 사적인 고백에 머물지 않는다. 철저히 사법적으로 기획된 '공격 무기'로 재편된다. 과거에 서로를 가장 뜨겁게 매료시켰던 지점들이 이제는 상대를 무너뜨리기 위한 법적 기소 사유로 치환되는 서글픈 역설이 시작되는 것이다.



​3. 누구의 싸움인가?


​"형사 사건 변호사는 나쁜 놈들의 최선을 보고 이혼 전문 변호사는 선한 사람들의 최악을 보죠."

​찰리는 니콜의 이혼소송장을 받고 변호사를 찾아간다. 찰리의 변호사는 니콜 변호사의 이름을 듣자마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리고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말해 준다. 찰리는 아직 당혹스럽다. 이러려고 했던 건 아닌데 어느새 전면전이 되어버렸다.


​어릴 때 참으로 이해 안 가는 점 중 하나는 할리우드 배우들이 이혼 후에도 친구로 지내거나 전 부인, 전 남편에 대한 애틋함이나 칭찬을 할 때였다. 이제는 국내에서도 어느새 '이혼'이란 단어가 예능에서도 하나의 장르로 소비되곤 있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분위기는 달랐다. 이혼은 아침 프로에 나와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듯 말하는 분위기가 일반적이었고, 대부분 이혼하면 당분간 자숙하는 분위기였다. 그것은 이른바 결혼할 때 수많은 축하와 사랑을 받았기에 그 대중의 기대를 무참히 깨었기 때문에 받는 당연한 과정이라 여기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와 돌이켜보면 참으로 보수적이고 권위적이던 시대였다. 이제는 조금은 고개가 끄덕여진다. 지나간 사랑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품위. 그리고 응원.


​찰리와 니콜도 그것을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혼 소송'이라는 거대하고 거친 폭풍 앞에 이것이 얼마나 허망한 바람인지 보여준다. 소송이 시작되는 순간 이 싸움은 더 이상 두 사람의 것이 아니다. 거액의 수임료를 굴리는 변호사들의 대리전이자 자본의 전쟁으로 변질된다. 서로를 향한 인간적인 존중과 서글픈 애정은 상대를 부적격자로 몰아가야만 하는 비정한 시스템 아래서 사치스러운 감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4. 무엇을 지키기 위해 합의하지 못하는가?


​이 전면전에 승자가 없다는 것은 찰리와 니콜도 느꼈을 것이다. 찰리가 소개받은 은퇴를 앞둔 늙은 변호사는 이렇게 조언한다.

​"이혼 소송을 질질 끌 경우 여기서 오는 부담감이 말도 못 해요. 아내랑 합의 보기 전에 결장암으로 죽은 의뢰인도 있었죠. "


​"합의는 임시적인 거예요. 헨리도 자라고 있고 자기 의견도 가지게 되겠죠. 시간이 당신 편이라고요."

​하지만 찰리는 양육권을 얻기 위해 진심 어리고 사려 깊은 변호사를 해고하고 처음 만났던 공격적인 변호사를 다시 선임한다. 누구나 그럴 때가 있다. 큰 변화의 전조 앞에서 내가 한 단 한순간의 선택으로 인해 모든 것이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낳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낄 때가. 허나 모든 선택은 임의적이며, 시간은 늘 일시적 변덕이 아니라 꾸준한 행동의 편이다.


​결국 서로에게 던진 칼날은 부메랑처럼 다시 내 가슴에 꽂힌다. 내가 가장 사랑했던 연인의 입에서 모욕과 조롱이 섞인 거친 말이 튀어나온다. 이때 날 향한 그 말은 그 의도와 '사전적 의미'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기에, 그 말을 하게 만든 당사자가 '나'이기에 무너지게 된다. ​좁은 아파트 벽 사이에 갇혀 서로를 향해 쏟아내는 폭언은 사실 상대가 미워서가 아니라 상실에 대한 극심한 공포와 절망이 비명으로 터져 나온 것에 가깝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말로 나를 베어낼 때, 주체는 완전히 무너져 내린다. 영화는 이 잔인한 언어적 폭력의 한복판에서, 여전히 서로를 붙잡고 울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의 찢긴 심장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낸다.



​5. 우리에게 남은 과제


​찰리와 니콜은 결국 이혼하지만 좋은 부모로 남는 것에는 최선을 다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애잔한 장면은 글을 읽지 못했던 아들 헨리가 처음에 엄마가 상담사 앞에서 읽지 못했던 아빠의 장점을 읽는 장면이다. 이제 둘은 서로의 바닥을 보았지만 미움과 분노를 넘어 서로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 또한 얻게 되었다.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설렘은 편안함을 이기지 못하고, 편안함을 유머를 이기지 못하며, 유머는 측은지심을 이기지 못한다고. 어쩌면 이 영화가 '이혼 이야기'가 아니라 '결혼 이야기'인 것은 이 모든 감정, 설렘과 편안함과 유머와 측은지심을 모두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혼은 또 다른 시작이기에 그들에게는 또다시 살아갈 (being alive) 과제가 남아있다.


​서로의 영혼을 가장 잔혹하게 짓밟았던 이들이 역설적이게도 그 지옥 같은 과정을 통과했기에 비로소 상대의 취약함을 가엽게 여기는 연민의 단계에 도달한다. 계약은 해지되었으나 신발 끈이 풀린 찰리를 위해 묵묵히 허리를 숙여 끈을 매어주는 니콜의 손길에는, 부부라는 이름을 넘어선 삶의 동반자적 유대가 담겨 있다. 상처를 안은 채로 다시 살아내는 것, 그것이 그들에게 남겨진 가장 뜨겁고도 무거운 삶의 과제이다.



​6. 노아 바움백의 스타일과 실화


​6-1. 공간과 동선의 연극적 스타일


​이 영화는 유독 연극적 요소를 영화 장면 내에서 잘 활용하고 있다. 풀샷으로 고정된 카메라와 배우들의 정해진 동선, 무대처럼 입장과 퇴장을 함은 물론, 바로 지금 눈앞에서 이 사건이 벌어짐을 강조하는 연출이 생생함을 더 해준다.


​인물들을 문틀이나 벽 등의 구조물로 분할하여 배치하는 연출은 심리적 단절감을 시각적으로 극대화한다. 감독은 감정을 강요하는 과도한 클로즈업 대신 인물과 공간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며, 관객이 이들의 고통을 자극적으로 소비하지 않고 일상 속에서 서서히 번져가는 슬픔을 객관적으로 응시하게 만든다.



​6-2. 자전적 경험과 감독 인터뷰


​잘 알려졌듯이 이 영화는 감독 노아 바움백의 자전적 이야기가 모티브가 되어 만들어졌다. 배우 제니퍼 제이슨 리와의 실제 이혼 소송 경험이 뼈대를 이루고 있지만, 감독은 이를 사적인 기록에 가두지 않고 제도의 비극이라는 보편적 진실로 확장하기 위해 수많은 조사를 병행했다.


​노아 바움백 감독은 영화의 자전적 성격과 창작 과정에 대해 유럽의 권위 있는 영화 전문 매체 시네유로파(Cineuropa)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명확히 밝혔다.



​"물론 나에게도 (이혼의) 개인적인 연관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또한 이 영화를 위해 많은 친구들을 인터뷰했고, 이혼 전문 변호사들, 사법 판사들, 그리고 조정인들을 인터뷰했습니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자전적인 요소는 아주 빠르게 전개되다가도, 이내 재료 자체가 요구하는 고유한 예술적 방향성에 따라 통제되고 형태를 갖추게 됩니다."


​— 노아 바움백(Noah Baumbach), Cineuropa 인터뷰 ("Noah Baumbach • Director of Marriage Story", 2019년 8월 30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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