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15일생이고, 그해 6월 18일 우리 가족이 되었다. 월령으로 17개월, 에너지 넘치고 애교 많은 고양이다.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내 침대 발치에서 폴짝 올라오더니 내 팔을 끄집어 어디론가 가자고 한다.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솜이를 따라 욕실과 연결된 파우더룸 쪽으로 두발 자욱 정도 움직였을 때였다. 마치 바람에 홀린 듯 얇은 도화지가 된 것처럼 내 몸이 가벼워지더니 파우더룸 캐비닛 사이로 빨려 들어갔다. 머릿속이 진공상태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고 몽롱해져 눈을 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렸을까?
내 키만큼 자란 초록색 스투키와 뱅갈고무나무가 정원처럼 둘러 쌓인 안쪽에 테이블과 의자가 보였다. 정교하게 잘 다듬어진 대리석 테이블 가장자리가 소라 뿔 장식처럼 조각이 돼있었고, 야트막한 의자에는 앉으면 몸이 푹 잠길 것만 같은 커다랗고 편안한 쿠션이 놓여 있었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초록색 눈을 가진 여자가 매력적인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며맞은편 의자에 앉으라고 눈짓을 한다.
"지금부터 내가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줄게요."
분명 우리말은 아닌 것 같은데.. 선명하게 들렸다.
나는 사실 조금 긴장을 했지만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고 무섭거나 불편한 마음도 들지 않았다.
낯선 얼굴이 분명한데.. 눈 빛은 매우 친근한 것이 솜이의 눈동자와 닮아 있었다.
"혹시.. 저를 알고 있나요?"
"물론이에요. 나는 당신보다 당신을 더 잘 알아요."
"나보다 더 나를 잘 알고 있다고요?"
"네, 맞아요. 요즘 당신의 복잡한 머릿속 이야기 때문에 더 많은 부분을 알게 되었죠."
믿기지는 않았지만.. 나 보다 더 나를 잘 안다는 묘령의 여자와 대화를 시작해보기로 했다.
묘령의 여자가 눈을 돌려 바라보는 곳으로 내 시선이 따라 움직였다.
그곳에는 화장대 앞에서 아이라인을 날렵하게 그리고 볼터치를 하는 서른 살의 내가 있었다. 화장을 새로 하고 이른 저녁식사를 하러 근사한 레스토랑에 갈 예정이다. 아침에 오토바이를 불러 빠통비치로 나가서 20~30분 태닝을 하다가 제트스키를 타고 놀다 들어왔다. 망고스틴과 코코넛 음료에 새우요리를 먹고 뽀송한 침대에서 뒹굴거리다가 다시 달뜬 마음으로 저녁 마실을 준비하고 있다.
하루에 화장을 두 번이나 할 수 있는 느긋함이란..
나는 원래 워커홀릭이었고 긴 머리를 감지도 않은 채 질 끈 묶고 출근하는 날도 많았다. 화장 잘하는 바지런한 여자들과 달리 일이 인생의 전부인 양 살고 있었다. 그런 내가 1년에 한 번 정도 시간을 만들어 쉼표를 찍는 방식이었다.
푸켓 다운타운에 있는 가성비 좋은 콘도를잡고, 1~2주 시간을 내서 멍청하게 시간을 보내는 거다. 좋은 여행친구가 있어 푸켓 구석구석 숨은 명소를 동네 사람처럼 누비고 다녔다.그 시간은 촘촘한 일상에 커다란 쉼표 같았다.
"서른 살의 당신이 그리운가요?"
"꼭 그렇지는 않아요. 다만.. 그때 느린 일상과 멍청하게 머리를 텅텅 비우던 그 느낌이 가끔 그립긴 해요."
"사실 요즘 많이 답답하거든요. 함께 사는 딸과 대화가 너무 어려워요."
"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생각해보니 대화가 막힌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어요.19년 12월에 이사를 했으니까.. 1년 반이 넘었어요."
나는 어느새 묘령의 여자에게 학부모 상담이라도 하는 듯 지난 1년 반의 상황, 아이의 상태와 대화의 빈도와 크게 다투었던 일들까지.. 무엇보다 엄마를 대하는 태도가 무성의한 딸 때문에힘들고 상처를 받는다며 푸념을 늘어놓고 있었다.
"딸이 엄마에게 듣고 싶은 말은 뭘까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어떤 말을 해도 귀 기울이지 않아요."
"그렇지 않아요. 딸이 어떤 말이 듣고 싶은지 잘 생각해 보세요. 딸은 엄마에게 듣고 싶은 말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