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서명

흰머리 독수리의 셀프 커트

byYujin


중학생이 되고부터 정수리 근처에 끊임없이 새치가 자랐다. 부끄러워 틈나는 대로 하나씩 뽑곤 하다가, 혹시 원형 탈모가 있느냐는 말을 들으면서 뿌리 염색을 시작했다. 몇 시간씩 머리를 물들이는 일을 20년 이상 반복하자 언젠가부터 고문처럼 느껴졌다.


무엇을 위해 독한 약품을 바른 채 꼼짝없이 몇 시간을 앉아 있는 걸까. 남들의 시선 때문에 죽을 때까지 이렇게 해야 하나? 천연 헤나를 사다 집에서 염색도 해봤지만 과정이 지난하고 시간도 더 오래 걸렸다.


약 사 년 전부터, 방부제와 화학 계면활성제가 흡수되는 게 싫어 물로만 머리를 감고 몸을 씻기 시작했다. 최근 일이 년 전부터는 물에 시카카이 가루를 더해 감는 방법을 혼자 알아냈는데, 허브 특유의 성분이 피지를 씻어내고 모발에 은은한 윤기를 더해준다. 뿌염 역시 그만두자는 결심이 서면서 블리치처럼 선명한 흰머리는 나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언젠가부터 반려인은 나를 흰머리 독수리라고 부른다.


물로만 머리를 감고 염색하지 않은 결과, 굵게 펌이라도 한 듯 힘차게 곱슬거리고 부슬거리는 원시적 자연모를 되찾았다. 미용실에 가면 다소 놀라워하는 반응이었다. 커트를 위해 매월 예약을 하고 남다른 머리카락을 만지게 하는, 그마저 디자이너가 바뀌면 새로운 누군가를 찾는 일이 번거롭게 느껴졌다. 마침 반려인이 자기 머리를 밀어봐 달라고 해서, 이발기를 사면서 커트보와 미용가위를 함께 주문했다.


셀프 커트를 쉽게 설명해 주는 한 유튜버의 영상을 보고 따라 하니 혼자서도 제법 머리를 자를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다시 찾아보니 그 계정이 통째로 사라졌다. 영상을 내리지 말아 달라는 댓글까지 달았는데... 할 수 없이 다른 영상을 찾아보니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나누고 다듬는 복잡한 방식들이 저마다 다르다. 결국 정해진 공식은 없고 각자의 취향이자 틀인가?


머리를 자르다 잘못되어 봐야 얼마나 큰일이 난다고 이렇게 고민을 하는지.

핸드폰을 내려놓고 옷을 훌훌 벗었다. 그냥 손 가는 대로 잘라보자.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은 아니고, 내 머리를 내가 자르는데 굳이 누가 정한 기준을 따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써걱 -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툭, 기분 좋게 떨어지는 머리칼. 양쪽 길이를 비슷하게 맞추어 슥슥 잘라내니 오랜만의 시원함에 콧노래가 나온다. 거침없이 가위질을 하다 잠시, 묶이지 않으면 어쩌지? 싶어 멈췄다. 일할 때 불편할 텐데… 잠시 뒤로 당겨보니 다행히 대부분 묶인다. 거칠게 잘려 삐죽거리는 머리끝이 날 것 같으면서도 개성 있지만, 더운데 숱도 줄일 겸 틴닝 가위로 다듬었다. 숱이 많아 전체적으로 몇 번을 솎아냈다.


마지막은 앞머리. 작은 부분이지만 일상의 직접적인 불편을 야기할 수 있고 첫인상을 결정짓는다. 예전 영상에서 본 방법이 어느 정도 떠올랐다. 앞머리 삼각존의 가운데 부분을 손가락 하나 정도 굵기로 모아 자르기. 나머지 양쪽은 그 길이에 맞추어, 바깥쪽으로 갈수록 비스듬하게.. 좋아, 다 끝났어.


사방에 떨어진 머리카락 더미를 실리콘 빗자루로 쓸어 담는다. 커트하고 치우기까지 25분 정도 걸렸을까? 미지근한 물에 시카카이 가루를 요거트 농도로 개어 머리를 감았다. 평소처럼 물로만 샤워하며 욕실을 정리했다.


누군가의 머리칼은 희거나 금빛, 누군가의 머리칼은 검거나 붉기도 하다. 파랗거나 핑크빛이기도 하다. 스스로 머리를 자르거나 맡기는 사이에 더 많은 선택이 있을 수도 있다.

고민 없이 자른 앞머리 위로 흰머리를 포함한 몇 가닥의 긴 머리가 흘러내린다. 어떤 부분은 조금 길고, 어딘가는 조금 짧은 머리카락들. 원하는 만큼 결정하며 잘라낸 흔적이 그 사이 수많은 서명처럼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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