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나를 만나야 할 시간

by담서제미

7번 국도를 따라 여행을 다녀왔다. 바다를 옆에 끼고 달리는 길은 언제나 그렇듯 아름다웠다. 차창 밖으로 낯익은 풍경이 흘러갔고, 이름 모를 마을의 낡은 지붕과 오래된 건물이 잠시 눈길을 붙잡았다. 창을 조금 열면 바람에 바다 냄새가 묻어 있었다. 길 위에서는 모든 것이 새로웠다. 매일 보던 하늘도, 길가에 무심히 자란 풀 한 포기도 걸음을 멈추게 했다.


집으로 돌아온 다음 날 아침, 나는 여행 전과 다름없이 눈을 떴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몸을 움직이고, 늘 하던 대로 하루를 준비했다. 다만 글을 쓰지 않았다. 컴퓨터 앞에 앉아야 한다는 생각도, 쓰지 못했다는 자바카라도 없었다. 그저 쓰지 않았다. 여행에서 돌아왔으니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당연한 생각마저 잠시 미뤄 두었다.


퇴직 후 3년째, 나는 비슷한 하루를 살아왔다. 수영을 하고, 산바카라을 하고, 해금을 켜고, 바카라을 읽었다. 낯선 언어를 배우며 먼 나라의 골목을 상상하기도 했고, 짐을 꾸려 일상 밖의 풍경을 만나러 떠나기도 했다. 일하는 동안 미뤄 두었던 것들을 하나씩 꺼내 나만의 시간을 채웠다. 누구의 눈치도, 누구의 허락도 필요 없는 시간이었다. 내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하루를 끌고 갈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나는 그 안에서 나만의 재미를 찾으려 애썼다. 하루는 어제와 비슷했지만 똑같지는 않았다. 같은 길을 걸어도 햇살이 기우는 방향이 달랐고, 같은 곡을 켜도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달랐다. 그 작은 차이를 줍는 일이 퇴직 후의 삶이라고 여겼다.


그러던 어느 순간부터 그 재미마저 심드렁해졌다. 좋아하던 일이 싫어진 것은 아니었다. 수영장 문을 밀고 들어가는 일도, 해금의 줄을 짚는 일도 여전히 좋았다. 다만 그것들을 시간표처럼 되풀이하는 나를 보았다. 자유를 얻었는데, 그 자유를 사는 방식까지 규칙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닐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겠다고 다짐해 놓고, 정작 무엇이 하고 싶은지는 묻지 않은 채 지내 온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올 초였다. 처음에는 글이 잘 써지지 않는 탓이라고 생각했다. 한 편을 마치면 다음 글을 구상하고, 생각을 가다듬어 문장으로 옮겼다. 살아온 날에서 이야기를 길어 올리고, 일상의 작은 장면에 뜻을 얹었다. 그렇게 쌓인 글을 다시 읽다 보면 낯익은 문장이 자꾸 눈에 걸렸다. 소재는 달라도 맺음은 비슷했고, 삶을 바라보는 자리도 그대로였다. 다른 날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데 이미 쓴 글을 되풀이하는 기분이었다.


비슷비슷한 글에 싫증이 났다. 누구보다 내가 먼저 지루해졌다. 글을 쓰는 일은 나를 알아 가는 일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나를 들여다보는 일이 나를 같은 자리에 붙들어 두는 것 같았다. 익숙한 감정으로 돌아가고, 이미 아는 마음을 다시 어루만지고, 내가 잘 쓰는 방식으로만 세상을 풀이했다. 글 속에서 새로운 나를 만나기보다 이미 아는 나를 확인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정리할 때가 온 듯하다. 무언가를 더 채우려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덜어 내야 할지 살피려는 것이다. 얼마나 쓰느냐보다 왜 쓰느냐를 먼저 물어야 한다. 잘 쓸 수 있는 글 말고, 아직 써 보지 못한 글에 마음을 기울여 볼 일이다. 익숙한 문장의 울타리를 벗어나 내가 잘 모르는 감정과 불편한 질문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보는 것.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소재가 아니라 낡은 시선을 벗는 일이다.


7번 국도의 바다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 길을 달린 나는 떠나기 전의 나와 조금 달라졌을까. 아직은 모르겠다. 다만 돌아온 아침, 글을 쓰지 않은 나를 다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이 마음에 남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에도 무언가 시작되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나는 이제 조금씩 배우는 중이다.


오래 산 사람에게도 낯선 시간이 필요하다. 익숙한 일상을 버리라는 뜻이 아니다. 그 안에서 너무 오래 되풀이해 온 생각과 버릇을 가만히 들여다보자는 것이다. 같은 길을 걸어도 다른 곳을 바라보고, 같은 하루를 살아도 어제와 다른 질문을 품어 보는 것.


그래서 나는 또 다른 재미를 찾아 나서기 전에, 내가 무엇에 싫증을 내는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부터 들여다보려 한다. 그 답이 글이 될지, 전혀 다른 무엇이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퇴직 후 3년, 나는 일상을 잘 살아가는 법을 익혔다. 이제는 그 일상에 기대앉지 않고, 나를 다시 흔들어 깨울 차례다. 새로운 삶은 무언가를 시작하는 순간이 아니라, 오래 해 온 일을 낯설게 바라보는 순간에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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