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팔. 을. 뻗. 는. 다.
늘 그렇듯이 팔은 말을 듣지 않았다. 마동의 입에서 또 한 번의 욕이 나왔다. 의족을 옮겨다 붙여 놓은 듯 전혀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고작 팔을 들어서 그녀의 손을 잡는 것뿐인데 어이 이봐, 가만있어, 나는 더 이상 네 생각대로 움직이기 싫어, 라고 팔은 마동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는 사이 그녀의 모습에 곰팡이가 끼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곰팡이가 그녀의 몸에 완전하게 증식했다. 마동은 소리를 지르며 두 팔을 뻗어서 그녀를 잡으려고 했지만 팔은 미술관의 거대조각처럼 전혀 움직이지 못했다.
저것도 나의 또 다른 에고일까. 슈퍼에고는 아이들을 괴롭혔고 그녀까지 괴롭히고 있다. 어째서 또 다른 나는 사람들을 괴롭히려고만 하는가. 나는 이럴 때마다 내 몸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가. 제발 멈추라고!
팔은 암흑의 바닥을 향해 밑으로 내려가 있을 뿐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아, 보고 싶어, 사라 발렌샤 얀시엔.
그녀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곰팡이가 덮어 버렸다. 곰팡이는 그녀의 몸을 점점 갉아 먹더니 먼지로 만들었고 흐리고 흐린 하나의 뿌연 그림자로 보일 뿐이었다. 그림자의 모습은 는개였다.
아니, 는개가? 아아, 괴롭다.
눈을 뜨니 낯선 방이었다. 예상 밖으로 어제보다 눈이 잘 떠졌다. 몸은 아주 가벼웠다. 그렇지만 몸은 아직 뜨거웠다. 몸이 뜨겁다는 명제에서만 벗어나면 정상적인 상태였다. 뜨겁다는 느낌은 뭐랄까, 뜨겁지만 뜨겁지 않았다. 분명 몸은 뜨거웠다. 불에 달군 주전자의 몸통처럼 뜨거웠지만 만져질 수 있는 뜨거움이었다. 눈을 떠서 동공을 움직여 방안을 살폈다. 시야에 들어오는 환경이 마동이 사는 집이 아니라서 놀랐고 일어나려고 팔을 드니 팔이 움직여지지 않아서 또 한 번 놀랐다. 가만히 생각했다. 암흑의 밑바닥 끝으로 한없이 추락하면서 불투명한 막 저편에서 사라 발렌샤 얀시엔을 보며 팔을 뻗었지만 팔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사라? 사라 발렌샤 얀시엔의 모습이 는개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애당초 사라 발렌샤 얀시엔이 아니고 는개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누가 되었던 확실한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이 답답했다.
그럼 나를 불렀던 그 연약한 목소리는 는개의 목소리란 말인가.
는개의 손과 닿았을 때 마동이 보았던 암흑의 세계를 는개도 보았던 것이 분명했다.
아 어지럽다. 혼란스럽다. 시신경으로 받아들이는 사물과 풍경이 전부 구겨져서 안으로 말려들어 오는 기분이다. 엉망진창이다. 누구 하나 제대로 말해 주지 않는다. 검사를 하고 나온 결과에 대해서도 의사는 말해 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어째서 여기에 누워 있는 것일까. 여기는 도대체 어디일까.
변이가 시작되고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고 질문투성이다. 마동은 옥상의 난간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리고 몸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고 그 순간 먼 곳에서 밝아오는 빛을 보며 자기 몸은 파란 불꽃에 휩싸여 타올랐다. 파란 불꽃은 욕망과 본능이 결합하여 증폭되었다가 마동의 몸에서 떠나갔다.
여기는 어디란 말인가.
분명 어제를 포함해 이전의 아침에 비해 몸이 가벼웠고 눈도 제대로 떠졌다. 한데 몸을 일으키려고 하니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대수술을 거치고 정신을 차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몸은 그대로이고 정신만 멀쩡했다. 팔도 다리도 생각과는 다르게 움직였다. 몸에 맞지 않는 톱니바퀴를 이어 붙여 놓은 듯 삐거덕거렸고 철탑 인간이 몸을 뚫고 마동의 몸 안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팔다리는 마동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붙어있고 팔을 들어 올리니 불편함이 녹록히 전해져 왔다. 마동은 일단 누워서 눈을 감았다. 이대로 있다가 눈을 뜨면 다시 돌아올 것이다. 평소대로.
침착하게 마음을 갖자.
혹여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지금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며칠 동안 너무 많은 일들과 변이에 마동의 사고와 신체는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자본주의 슬롯에서 죽음은 모두 쉬쉬했다. 단체로 죽음을 맞이하면 그만큼의 비용이 충당되는 것이다. 서류와 결제를 통해 드는 비용이 많아지면 서로 간에 갈등이 생기고 갈등을 소비하려 또 비용이 든다. 자본주의는 들어가는 비용이‘최소한’이라는 목적에 맞추어서 움직이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최소’의 비용 속에는 사람들의 목숨이 사라지는 것도 용인된다. 단체로 맞이한 죽음에서 누군가 죽지 못해 살아났다고 하면 살아난 자에게 들어가는 비용에 대해서 여러 가지 관여가 또 시작된다.
요컨대 정부가 공무수행 중에 정부의 차에 치여 교통사고를 당한 일반인이 팔다리를 잃었거나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었다면 정부는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에 대해서 개입하고 개인을 위한 허울 좋은 보상이라는 명분으로 매스미디어를 이용한다. 국가는 축척의 욕망이 가득하여 자본을 매몰시켜 놓는다. 그 와중에‘공공성’이라는 관념이 빠져버리게 된다. 국가 기둥의 붕괴는 이곳저곳 늘 일어나고 있지만 정부는 바카라임을 회피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 속에서 국민의 죽음이 이루어지면 공공성은 더욱 회복하기가 어려워지고 국민을 위한 국가구조가 아닌 소수를 위한 시스템으로 불신만 가중된다. 갈등이 점진적으로 커지며 갈등 해소에 들어가는 비용 또한 어마어마해진다.
결국 교통사고를 당한 당사자만 절망 속에서 하루를 보낼 것이고 정부를 비난하며 시간이 갈수록 일상과는 자연스럽게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정부를 비난하는 당사자에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늘어나고 당사자는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소외되어 간다. 일부 당사자와 가족이 전사로 변하지만, 정부는 거대한 아케이드다. 맞서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뿐이다.
당사자는 시간이 갈수록 과연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것인가. 국가가 나서서 해줘야 할 일을 국가가 외면해 버리고 나면 피해를 본 당사자는 격렬한 사랑을 하며 아름다운 꽃을 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된다.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슬롯라고 불리는 큰 덩어리, 그러니까 자본주의는 당사자의 암울한 모습을 하고 생활하는 것을 시간이라는 매개를 빌려 덮으려는 자세를 취한다. 개인의 고통은 개인이 알아서 하라는 분위기가 강했으며 관료들은 친분으로 쌓은 탄탄한 권력으로 자본을 회수하려는데 주력할 뿐이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