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찰이 사라진 세상

2026년 4월 8일 23:20

by김까치

“모두가 자동화에 내몰렸어요. 요즘 목에 칼이 들어온 기분으로 일해요”



급류에 휩쓸려가는 개발자


함께 일하는 동료 개발자가 어제 내게 이런 말을 건냈다. 작년부터 AI가 화두였지만, 요즘은 그야말로 거대한 급류에 정신없이 떠내려가는 기분이란다. 자고 나면 새로운 스킬과 툴이 쏟아져 나와서, 잠을 줄여가며 써보고 개발 과정의 리드타임을 줄이는 게 제1의 목표가 되었단다.


그의 말을 빌자면, 하나의 업무를 오래 담당하며 쌓는 도메인 지식은 큰 의미가 없어졌다. 지식은 이미 ai 에이전트가 가지고 있다. 이제 ‘유능한 개발자’란, 아웃풋이 잘 나오도록 에이전트를 관리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여럿이 하나의 결과물을 만들던 풍경 역시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90년대가 좋았지


아내와 저녁을 먹다가, 우리 어렸을 때 있었던 국룰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 부부는 둘 다 80년대 중후반 태어난 세대라서 보고 자란 것들이 비슷했다. 우리는 특히, 90년대를 지배한 국룰들을 좋은 기억으로 가지고 있었는데, 이때는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었다.


늘 같은 시간 ‘진짜 종’을 울리며 온 동네를 돌아다니던 두부 트럭, 집집마다 있던 유선 전화, 대여섯 개는 거뜬히 외우던 전화번호, 공중전화 앞의 줄, 다달이 납부 도장을 받던 학원비 봉투, 연애편지, 비디오 대여점, 친구를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와 시간, 온갖 업종의 소매점 같은 것들.


우리가 종종 나누는 이런 대화의 끝은 늘 ‘그때가 더 좋았던 같다’는 말로 맺어진다. 무슨 일이든 품이 많이 들고,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야 하던 시절인데도 그렇다. 나는 이런 감상이, 내 유년기가 그 시절에 있었기 때문인지, 인간의 본성 같은 것인지 가끔 궁금하다.



The 2028 Global Intelligence Crisis


지난 2월에 미국 시트리니 리서치에서 발표한 보고서를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대목은 ‘ai 에이전트가 중개 경제를 붕괴시킨다’는 부분이었다.


(중략) AI 에이전트가 소비자 의사결정을 대행하면서 중개 경제 전반이 해체되었습니다. 여행, 보험, 부동산, 결제 등 인간의 마찰을 수익화히던 산업이 붕괴하였고, 에이전트들은 카드 인터체인지 수수료마저 스테이블코인으로 우회하기 시작했습니다.


읽으면 당연한 말 같지만, 나는 그전까지 우리가 늘 마주하는 경제 활동들이 ‘평범한 인간 사이의 마찰’에 기반한다는 생각을 가져보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휴대전화가 보급된 후, 인터넷이 보급된 후, 스마트폰이 보급된 후, 동네 상가의 업종이 서서히 단조롭게 변화된 것 같다. 당연히, 상가라는 곳에 들어갈 일 자체도 줄었다.



트럼프


애당초 좋아하지 않는 타입이지만, 나는 이번 전쟁 국면에서 그가 보여준 행태에 그야말로 질려버렸다. 특히 일관성 없는 행동, 무바카라임한 메시지, 흔적도 없는 품위, 땅에 떨어진 신뢰에 혀를 내둘렀는데, 무엇보다도 ‘그럼에도 개의치 않는 태도’에 경악했다.


흔히들 말하듯 그는 독단적이며 결과 지향적인 부류다. 협상은 헤드 투 헤드를 선호하고, 조직은 예스맨으로 채운다. 그러므로 그의 업무에는 중간 과정이랄게 없다. 속도는 빠를지 모르겠으나, 결과는 3월 내내 모두가 본 그대로다.




이쯤되니, 세상이 오래전부터 마찰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고 느낀다. 좋고 나쁨을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 동료의 말처럼, 지금은 급류가 몰아치는 구간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몸을 던질지 말지는 내가 결정할 수 없다. 우리는 애초부터 흘러가는 존재였다.


다만 궁금한 것은, 아직 어린 아들이 살아갈 세상의 모습이다. 내가 90년대를 말하듯, 그에게 있어 지금이 그럴만한 구석이 있는 시절인지, 조금도 가늠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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