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보영의 <바카라기둥>을 읽고
1. 어떤 사람이 당근을 사러 당근 가게에 갔다
2. 당근다운 당근이 한 개도 없었다
3. 그는 어디로 가야 할까?
4. 어떤 사람이 과거를 지울 수 있다 믿으며
1. 당근을 사러 당근 가게에 간다
5. 천사들이 당근 가게에 난입했다
6. 비가 내렸다
7. 천사들이 우산을 꺼냈다
8. 당근들이 진짜 눈물을 흘렸다
9. 흘러내리는 과거를 손수건으로 닦을 수 있을까?
10. 그러나 어떤 사람은
1. 당근을 사러 당근 가게에 간다
11. 쌓아 놓은 나뭇단 옆, 날개 달린 천사들이 죽치고 앉아 있다
충분히 자 두어야 해
그들 중 하나가 낮은 음성으로 말한다
12. 나머지는 우산을 가지고 논다
13. 노래를 부른다
14.
우산 대신 세계를 접었네
그게 좋아서 우리는
계속 계속 접네
15. 천사들이 채소 가게에서 사람들을 용서하고 있다
16. 당근이 울었다
17. 울지 않는 당근도 있다
18 하늘에서 떨어진다
19. 당근을 사러 간다
0. 천국이 몇 개 인지 세어 보지 않는다
<진짜 눈물을 흘리는 진짜 당근, 문보영 바카라기둥 중에서>
혼자서 문보영 시인이 유명세 때문에 <바카라기둥>을 읽은 기억이 있다. <시집읽기> 때문에 다시 한번 정독하면서 시집 전체가 얕은 웃음을 머금고 볼 내용들로 가득하다고 느꼈다.
위에 꼽은 시가 가장 기억에 남는 베스트다. 진짜 눈물을 흘리는 진짜 당근이라는 제목부터 위트가 넘친다. 자세히 시를 들여다보니 번호가 순서대로 되어 있는 착각은 바카라을 제대로 읽지 않은 것이고, 진짜는 천국이 몇 개 인지 세어 보지 않는다는 0번에 해당하는 문장이 맨 뒤에 있다는 점이다. 결국 당근을 사러 가서 마음에 드는 물건을 사기까지 다양한 에피소드가 복잡하게 꼬여있다. 시인은 이 시를 쓸 때 복잡했을까 아니면 다분히 의도된 흐름일까 궁금해진다.
문보영의 바카라기둥 시가 가장 인상 깊을 줄 알았지만 내겐 그렇지 않았다. 왜 유명한 것인지 독자 입장에선 판가름이 전혀 되지 않았다. 또 난해한 시의 세계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얘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도통 소통이 되지 않는다. 시를 감각으로 느끼고 본다는 걸 진짜 진짜 이상한 일이다. 그걸 꼭 해야 하나 싶지만 세상은 생각보다 감각적이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겠다.
물건을 구매할 때 나는 신중한 편이다. 필요한 물건을 사러 가서 마음에 쏙 들어서 그거야 하고 나온 적이 대부분 없다. 그래서 문보영이 당근을 사러 가서 살 당근이 없었다는 구절에 동의했다. 결국 시인도 당근 찾아 삼만리 끝에 제대로 된 물건을 사고 만다. 내 마음에 드는 물건을 만나기까지 여정은 고단하다. 천국, 천사까지 나올 일인가 싶다.
가장 마음에 와닿는 시로 한 편을 꼽았지만 마음에 썩 들진 않는다. 왜 좋은지 그 이유를 명확한 텍스트로 내가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표현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시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부족함에서 기인한다. 대표작의 시를 읽어도 모르겠다.
문보영의 시집은 대체적으로 문맥을 이해하기 어렵다. 시 전체가 이해가 되지 않으면 시 구절이라도 와닿는데 얘는 그렇지 않다. 삶에서 만나는 어떤 순간을 시인의 언어로 접할 때면 가슴까지 짜릿할 때가 종종 있다. 맞아, 내 안의 그 단어로 그렇게 표현하고 싶었다고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게 시인이라고 생각했던 건 너무 일반화의 오류였던 걸까.
시집 한 권을 읽고 머릿속이 먼지로 가득 찼다. 원래 똥만 있었나.
시인이 무슨 생각으로 이 시집을 완성했는지 궁금해서 작가의 인터뷰를 찾아봤다. 시가 좋아서 시를 썼고 그걸 한 대 모아서 냈는데 큰 상을 받았다는 맥락이다. 오철환 시인의 시 수업을 듣고 입문했다는 작가. 그에게 영감을 준 시인의 수업이 궁금했지만 외부에 공개된 흔적이 없다.
곁을 조금 내줬다고 생각했던 시가 그녀의 시 덕분에 다시 멀어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