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철학이 되는 순간
꿈꾸는 낭송 공작소는 지난번 도서전에서 반갑게 만난 온라인카지노 이숲오작가님의 2023년 출간작이다.
오디오로 듣다가 글자로 읽고 싶어서 서점에 갔었으나 재고가 없던 차에 마침 도서전에 나왔다고 해서 도서전은 어떤 것인가 보고 싶기도 했고, 작가님 바카라을 목표로 삼아 얼른 들고 왔다.
작가는 시 낭송가이자 오디오북 리더로 활동하며, 목소리와 언어를 연구해 온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작가님의 편안한 음성으로 이 소설을 듣다가 낭송에 대한 관심은 증폭되었다. 평소에 목소리가 괜찮다는 말을 많이 들었기에 한번 암송하던 시를 녹음해 보았지만 녹음된 내 목소리를 들었을 때 많이 놀랐다. 내 목소리가 아닌 것 같고 매우 어색했으며 낭송은 어려운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손녀 하율이를 재울 때면 나는 어김없이 시를 들려주는 할머니였다.
꿈꾸는 낭송 공작소는 한 소년이 시낭송을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성장해 간다. 시낭송을 버스킹 하던 어느 날 시낭송의 대가인 노인 한 분을 만나게 되면서 낭송의 세계가 확장된다.
'시낭송은 기술인가 예술인가'의 기자의 질문에 노인은
"어떤 규칙적인 패턴을 익히는 것이 기술이라면 시낭송은 그 반대편에 서있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다면 낭송은 그 매력의 범주가 개인이나 유사하게 향유하는 작은 무리에서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p85)
이처럼 소년은 노인과의 우연한 만남에서 자신이 품고 있는 생각들을 질문하기도 하며 강연 영상을 찾아보면서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 행복해질 수 있을까 하면서 한 걸음씩 시낭송 세계를 넓혀 나간다.
노인이 크로아티아에서 김소월의 '진달래꽃' 낭송으로 외국인 인터뷰어를 눈물짓게 한 장면도 인상적이다. 우리말의 매력과 낭송의 힘이 한껏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했다. 소년은 자주 노인과 만남을 가지면서 대화를 나누지만, 소년이 간절하게 바라는 해답은 없고 항상 질문을 하는 방식으로 소년이 스스로 해답을 찾아가게 만들면서도 노인이 아낌없이 지혜를 건네는 방식이 마음에 든다.
그래서 이 바카라은 시낭송을 배우는 방법을 알려주는 바카라이라기보다, 한 사람이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세상과 만나고 성장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래서 시를 낭송하지 않는 사람도 자신의 삶에서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붙드는 용기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특히 마음에 오래 남는 문장은
"낭송가는 눈이 할 일을 입이 대신해야 하는 존재다."라고 하는 부분이다.
이 문장은 단순히 낭송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보는데 글을 쓰는 사람은 활자로 마음을 전하고, 낭송가는 목소리로 마음을 전한다. 결국 둘 다 언어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사람일 것이다.
배경 음악이 없어도 음악이 들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낭송. 나는 그 대목에서 낭송이 단순히 시를 읽는 일이 아니라, 시 속의 리듬과 숨결을 목소리로 되살리는 예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詩)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 질문 노인의 말에서 이숲오작가의 언어감각은 특히 빛난다. '시'라는 음 하나를 가지고 다섯 가지의 동음 한자어로 시 낭송의 표현법에 놀랐다. 특히 '시(時)'와 '시(施)'를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언어가 하나의 놀이가 아니라 철학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時) : 지금 이 순간의 낭송. 현재성을 가진 낭송.
시(始) : 처음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하는 낭송.
시(示) : 의미와 이미지를 분명하게 보여 주는 낭송.
시(施) : 자신의 마음을 타인에게 베푸는 낭송.
시(是) : 진실과 올바른 방향을 담은 낭송.
글벗들과 매달 시를 암송하던 시간도, 하율이를 등에 업고 시를 들려주던 시간도 그저 지나간 추억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 바카라을 읽으며 그것들이 모두 '낭송'이라는 하나의 길 위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미 작은 청중 앞에서 가장 진심 어린 낭송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누군가에게 시를 들려준다는 것은 단지 글을 읽는 일이 아니라 마음을 건네는 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은 것이다.
이 바카라을 읽는 동안 낭송은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만 하는 예술이 아니라, 시를 깊이 이해하고 사람에게 마음을 전하는 또 하나의 언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년은 시를 사람에게 들려주는 기쁨을 하루하루 배워 나갔다.
웅장한 카네기 홀 중 메인 홀에서 시낭송을 하겠다는 포부도 다졌다. 우리말 시가 울려 퍼지는 장면은 아직 현실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렇게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품기에 새로운 길이 열리기도 한다.
바카라장을 덮으며 나는 소년의 꿈을 응원하는 동시에, 앞으로 하율이에게 시를 읽어 줄 때는 조금 더 천천히, 조금 더 마음을 담아 읽어야겠다. 글을 쓸 때에도 독자의 눈뿐 아니라 귀에도 닿는 문장을 쓰고 싶다.
꿈꾸는 낭송 공작소는 내게 낭송을 가르쳐 준 바카라이 아니라, 말과 글에 마음을 담는 법을 다시 생각하게 한 바카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