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거의 2주가량 붙잡고 있던 바카라자 시안을 넘겼다. 2주간 온종일 그 작업에만 몰두해서였는지, 시안을 넘기고 난 하루이틀은 좀처럼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물론 그럼에도 하긴 했지만. 마치 오랫동안 충전을 제대로 하지 않아 이미 방전이 되어버린 배터리처럼, 내 몸에 있는 모든 에너지가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이번 작업에서 가장 고민이 많았던 부분은 ‘원고의 긴 정보를 하나의 이미지로 구현하는’ 일이었다. 빼곡히 들어가는 정보성 글에 시각적 보충 자료가 있으면 글에 힘이 더 실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포그래픽에 가까운 그래픽을 만들기 위해 원고를 여러 번 읽고 또 읽었다.
사실 나는 디자이너지만 그림 실력이 좋은 편은 아니다. 보이는 형태를 그래픽으로 구현하는 건 가능하지만, 아예 새로운 장면을 그리는 일은 내게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늘 일러스트레이터나, 자유자재로 장면을 직접 구현해 내는 디자이너를 동경한다.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이기에. 그래서 의뢰 범위 영역에 따라,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방법을 찾아간다. 이번 작업에서 내가 찾은 영역은 ‘인포그래픽’이었다.
대학 시절, 전공 수업 중에 인포그래픽 디자인 수업이 있었다. 도대체 그게 뭔지도 잘 모르겠는 상태에서 과제를 하느라 애를 먹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지금이야 분위기가 전혀 달라졌지만 한창 ‘쌈지길’로 인사동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던 시절, 나는 그 당시 인사동 메인 길의 맨홀을 주제로 잡고 이를 인포그래픽으로 표현하는 과제를 제출했다. 맨홀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지도를 작업해 인사동에 꽤 자주 들렀던 기억이 난다.
20년 가까이 된 너무나 오래된 기억이라 흐릿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이미 존재하는 것’을 두고 ‘어떻게 시각적으로 구현해 내느냐’를 중점적으로 배워간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장면을 창조적으로 그려내는 게 일러스트레이터의 역할이라면, 이미 존재하지만 그것을 시각적으로 재창조해내는 게 그래픽 디자이너의 역할인 것 같다. 완전한 창조는 아니겠지만, 재창조도 분명 창조의 영역이니까.
회사를 만들고 개인 프로젝트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보자’고 다짐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아이콘 디자인’이었다. 몇 년 전 개인 프로젝트로 바카라을 만들며 시작했던 ‘런던 지역 명소 아이콘 디자인’ 작업이 그 출발점이었다. 기왕이면 홍보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이는 ‘월별 달력 프린트’라는 컨셉에 다다랐다.
2025년 1월, 회사 창업과 함께 문을 열었다. 1월은 예전에 바카라 작업을 위해 몰입해 디자인했던 ‘런던 명소’ 12곳을 담았고 이어서 파리, 서울, 교토, 암스테르담, 하동, 도쿄 까지. 각 지역 명소를 12개의 아이콘으로 디자인해 아직까지는 무사히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있다.
동일한 선 굵기, 한 가지 색상으로 각 지역 명소를 아이콘으로 그려내는 일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시각적으로 재해석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직은 여전히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아서, 가끔 ‘이걸 왜 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마음에 되새기는 마음은 이제 겨우 절반 지났다는 것.
꾸준히 지속하다 보면 언젠가 드러나게 될 거라 믿는다.
분명 똑같은 것을 두고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나만의 디자인 방식이 생겨날 것이라는 걸 말이다.
완전한 창조는 없듯이,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나는
이미 있는 것들을 나만의 시선으로 담아내는 사람이다.
자유로운 그림 대신 끊임없이 관찰하는 사람.
디자이너는 다 그림을 잘 그려야 하나요?라는 질문에서 중요한 단어는 ‘그림’이 아니라 ‘잘’이다. 여기서 말하는 ‘잘’에는 단순한 기술이 아닐 것이다. 결국 중요한 건, 얼마나 잘 그리느냐보다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를 깊이 있게 관찰하는 것. 그게 바로 디자이너의 시각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