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기산의 여운을 안고 지지 않는 태양의 광장으로
스위스에서 마주하는 마지막 산, '산들의 여왕'이라 불리는 리기산을 구석구석 둘러보았다. 내려오는 길에는 붉은색 산악철도에 몸을 싣고 푸른 호숫가 마을인 비츠나우로 향했다. 톱니바퀴 바퀴가 굴러가는 덜컹거림 속에서,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초록빛 구릉과 멀어지는 만년설의 풍경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부지런히 눈에 담았다.
비츠나우에 도착한 우리 가족은 다시 루체른행 유람선에 올랐다. 오전에 리기산으로 향할 때는 객실 안 테이블마다 사람들이 가득 차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객실 밖 갑판에서 세찬 바람을 맞으며 전경을 바라보아야 했다. 비록 온몸으로 스위스의 자연을 느끼는 매력은 있었지만, 돌아가는 길에는 조금 더 아늑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배에 타자마자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 덕분에, 다행히 이번에는 창가 쪽 좋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안도감과 함께 찾아온 잔잔한 피로를 달래려 따뜻한 커피와 달콤한 케이크 한 조각을 주문했다.
부드러운 케이크 한 입에 쌉싸름한 커피 한 모금을 머금고, 창밖으로 흐르는 루체른 호수의 투명한 물결을 바라보았다. 그 너머로 우리가 방금 전 발을 딛고 서 있던 리기산의 장엄한 실루엣이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그 거대한 자연을 걸었던 순간, 정상에서 바람을 맞으며 감탄했던 기억들이 커피 향과 함께 따스하게 되새겨졌다.
달콤한 휴식과 아쉬운 여운을 싣고, 유람선은 미끄러지듯 나아가 마침내 우리의 숙소가 있는 루체른에 도착했다. 스위스에서의 마지막 산이 보내온 배웅은, 더없이 아늑하고 평화로웠다.
유람선에 내려서는 카펠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다리는 14세기에 지어진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보행교 중 하나로, 지붕 아래에 루체른의 역사와 성인을 그린 삼각형 그림들이 걸려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다리 옆의 팔각형 석조 탑과 함께 루체른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다리 양 옆의 난간에는 활짝 핀 꽃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놓여 있는 것이 오래된 목조 다리의 형상을 더욱 멋지게 그려주었다.
카펠교를 건너서 호숫가를 천천히 거닐었다. 내일이면 이제 스위스를 떠나야 하기에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자세하게 담고 싶었다. 넓은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데 서너 마리의 백조들이 유유히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가기도 하고 그런 후에는 날개를 활짝 펴고 뽐을 내고 있었다. 태어나서 난생처음으로 루체른에 와서 백조라는 새를 볼 수 있었다.
달콤한 휴식과 아쉬운 여운을 싣고, 유람선은 미끄러지듯 나아가 마침내 우리의 숙소가 있는 루체른에 도착했다. 스위스에서의 마지막 산이 보내온 배웅은 더없이 아늑하고 평화로웠다.
유람선에서 내려서는 자연스럽게 카펠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14세기에 지어진 이 다리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보행교 중 하나로, 지붕 아래마다 루체른의 역사와 성인들의 모습을 그린 삼각형 판화들이 빼곡히 걸려 있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다리 곁을 묵묵히 지키고 서 있는 팔각형 석조 수탑은 빛바랜 목조 다리와 묘하게 어우러지며 루체른 고유의 고풍스러운 낭만을 뿜어내고 있었다. 특히 다리 양옆 난간을 따라 처음부터 끝까지 활짝 피어 있는 다채로운 꽃들은, 자칫 투박해 보일 수 있는 오래된 목조 다리에 화사한 생기를 불어넣으며 한 폭의 수채화를 완성해 주었다.
카펠교를 건너 유람선 선착장 반대편의 호숫가를 천천히 거닐었다. 내일이면 정들었던 스위스를 떠나야 하기에, 얼마 남지 않은 이 시간 속에 눈에 밟히는 모든 풍경을 더욱 자세히, 그리고 깊이 담아두고 싶었다.
걸음을 멈추고 넓게 펼쳐진 루체른 호수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마침 서너 마리의 백조가 유유히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더니, 이내 하얀 날개를 활짝 펴고 우아한 자태를 뽐내기 시작했다. 칠십 평생을 살면서도 백조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림바카라 속에서나 보던 그 순백의 새가 눈앞의 호수를 거닐고 있다는 사실이 왠지 모르게 신기하고도 감격스러웠다. 호수 위를 수놓는 눈부신 날갯짓을 바라보고 있으니, 이번 스위스 여행이 우리 가족에게 안겨준 수많은 선물 같은 순간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그 모습은 마치 루체른이 떠나는 우리에게 보내는 마지막 인사처럼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 향한 곳은 루체른의 명소인 '빈사의 사자상'이었다. 프랑스혁명 당시 튈르리 궁전을 지키다 목숨을 잃은 스위스 근위병들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기념물이라고 한다.
절벽을 깎아 만든 거대한 사자는 창에 찔린 채 힘없이 몸을 누이고 있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방패를 품에 안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바라보니 금세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은 슬픔과 모든 것을 받아들인 듯한 평온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많은 사람들이 이 조각상 앞에서 말을 아끼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 역시 한동안 발길을 떼지 못한 채 상처 입은 사자의 눈빛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묘하게도 여행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있는 내 마음속 아쉬움과 닮아 있었다.
사자상을 모두 둘러보고 정문을 빠져나오니 자그마한 공원이 나타났다. 잠시 다리도 쉴 겸 공원 한쪽의 빨간 벤치에 나란히 앉아 오늘 스위스에서의 마지막 저녁을 먹을 곳을 찾아보았다. 이번에도 역시 든든한 아들과 딸이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맛집을 고르고 있었다. 아이들의 고심 끝에 드디어 목적지가 결정되었고, 우리는 설레는 발걸음으로 그곳을 향해 걸었다. 루체른 오후의 태양은 어느새 짙은 구름 뒤로 숨어 보이지 않았고, 방금 보고 온 빈사의 사자상을 닮은 연한 회색빛 노을이 루체른의 저녁 풍경을 잔잔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루체른 구시가지 한가운데에 자리한 바인마르크트 광장이었다. 드디어 스위스에서의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할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광장 주변에 즐비한 음식점 중 아이들이 고른 한 곳을 택해 안으로 들어섰고, 지배인의 친절한 안내에 따라 광장이 한눈에 내다보이는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가장 먼저 이국적인 빛깔의 칵테일이 서빙되었고, 이어서 이름은 잘 알지 못하지만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운 로컬 음식들이 차례대로 나와 테이블을 풍성하게 채웠다. 메뉴가 무엇이면 어떤가. 든든한 아이들이 제 아비에게 좋은 것을 대접하려 상의 끝에 정성껏 시킨 음식이니, 먹어보지 않아도 당연히 최고의 맛일 수밖에 없었다.
식사를 즐기는 사이 루체른의 밤하늘은 어느덧 깊고 검게 물들었다. 그러나 이곳 바인마르크트 광장만큼은 화려한 조명 불빛 덕분에 또 하나의 태양이 지지 않고 머무는 듯 밤을 잊은 채 환하게 빛났다. 우리 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조명등은 마치 밤하늘의 별을 떼어다 놓은 것처럼 반짝반짝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따스한 별빛에 반사된 음식을 한 조각씩 떼어먹는 맛이란, 입안 가득 루체른의 낭만이 흠뻑 배어 드는 듯 감미로웠다.
스위스에서 맞이한 이 마지막 저녁 식사의 풍경을 가슴속에 깊이 담아두고, 우리는 광장 주변의 고풍스러운 건물들을 눈으로 담으며 숙소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밤이 깊어갈수록 광장 옆 호수의 물결 위로 비치는 건물들의 불빛이 한층 더 세련되고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스위스가 우리 가족에게 건네는 마지막 밤인사는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숙소로 돌아와 창밖으로 흘러가는 루체른의 밤 풍경을 가만히 내다보았다. 잔잔한 호수 위에 일렁이는 불빛들을 보고 있으니, 지난 스위스 여정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거대한 대자연의 품속에서 숨이 멎을 것 같았던 그랜드 캐년의 장엄함과는 또 달랐다. 알프스의 영봉들이 뿜어내는 만년설의 신비로움, 융프라우로 향하던 이거 익스프레스의 설렘, 그리고 오늘 '산들의 여왕' 리기산이 내려준 평화로움까지. 스위스는 우리 가족에게 매 순간이 기적 같고 선물 같은 풍경을 아낌없이 펼쳐주었다.
무엇보다 칠십 평생 앞만 보고 달려온 이 아비의 칠순을 축하해 주겠다며, 바쁜 일상을 쪼개어 이 먼 이국땅까지 동행해 준 아들과 딸이 곁에 있었기에 이 모든 풍경이 더욱 눈부시게 빛날 수 있었다. 녀석들이 정성껏 차려준 마지막 만찬의 온기가 여전히 마음속에 따스하게 남아있다.
내일이면 이제 정들었던 이 요술 같은 나라를 떠나 다시 나의 일상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 비록 스위스의 물리적인 관광은 오늘로써 모두 끝이 났지만, 내 가슴속에 새겨진 이 별빛 같은 기억들은 앞으로 살아갈 날 가만히 꺼내어 볼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이제 스위스에서의 마지막 밤을 정리하며, 다음 편에서는 이번 칠순여행 전체를 관통했던 생각들과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던 이야기들을 모아 마지막 '에필로그'로 이 연재의 마침표를 찍으려 한다. 길었던 여정의 진짜 마지막 이야기를 향해, 조용히 바카라장을 넘기듯 마음을 가다듬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