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사느니 안 살고 말지
진짜 마지막이야
취업했다. 그렇게 취업 거부다 뭐다 입만 털어 놓고 결국에는 또 취업했다.
그간 나는 내 시간을 타인에게 통제 받지 않고, 공간의 제약 없이 살고 싶다는 꿈을 꾸며 전업 소설가를 목표로 달렸다. 그러나 소설은 매일 일정량의 생산이 보장되지 않는 데다가 생계를 전적으로 바카라임질 수 있을 정도의 수입은 벌지 못하고, 일은 많으며 힘은 무지하게 든다. 게다가 쓰고 있는 글이 잘될지 어떨지도 모른다. 열심히 썼는데 안 팔리는 건 고사하고 앞으로의 꾸준한 작품 활동이 약속된 것도 아니다. 독자나 출판사가 나를 찾아줄 거라는 보장도 없다. 잊히는 건 아닐까 늘 두려웠다. 딱히 실력이 오르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작업물이 매번 성에 차는 것도 아니다. 혼자만의 고독한 싸움이다. 매번 수많은 잼얘들 사이에서 눈에 띄어야 하고 군계일학이어야 하고 나를 입증해야 한다. 내가 원하는 건 잘나지 않아도 괜찮은 세상이지, 잘난 놈만이 살아남는 세상이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 소설이 내 생계의 전부가 되자 단순히 "내가 좋아하는 글을 쓴다"는 마음으로 있을 수 없어졌다. 더구나 응답 없는 노력은 나를 지치게 만들었고, 매 순간 나를 증명하지 않아도 괜찮은 삶을 갈망하게 됐다. 만약 소설이 내 전부가 아니라 놀이이자 "딴짓"이 되면 조금 숨통이 트일까 싶었다.
적어도 숨 쉴 시간은 주셔야죠
문제는 그런 생각으로 회사에 취업했더니 이젠 도리어 "숨 쉴 시간"조차 없다는 점이다. 회사는 최대한 적은 투입으로 많은 결과물을 뽑아내려 하는 조직이다. 나를 고용한 사장놈은 나에게 눈코뜰 새 없이 바빠야 정상이라며 그러잖아도 일이 많아 죽겠는데 일을 마구 얹어 주곤 했다. 아침에 도착하면 아직 정식 근무 시작 시간도 아닌데 표독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댔고, 그러면 어김없이 온갖 업무를 쥐여줬다. 근무 시간에 그렇게 걸레 짜듯 쥐어짜이고 나면 집에 돌아오자마자 녹초가 되어 쓰러졌다. 잠을 자는 것 외에는 뭘 할 수가 없었다. 하려고 해도 피곤해서 집중이 되어야 말이지. 애초에 뭘 할 시간도 없었다. 지각하지 않으려면 적어도 새벽 5시엔 일어나야 했고, 새벽 5시에 일어나고도 회사에서 졸지 않으려면 최소한 12시 이전에는 무조건 잠들어야 했다. 그런데 12시까지 기다릴 것도 없었다. 일을 마치고 피곤한 정신으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운동하고 식사까지 끝낸 뒤에는 정말 기절해버렸기 때문이다.
오후 8시나 9시부터 잠들었다가 새벽 1시나 2~3시 쯤 일어나는 식으로 생활 패턴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자야할 시간에 자지 못하고 이래저래 생활리듬이 꼬이니 자연히 소설 집필 또한 더뎌질 수밖에 없었다. 시간을 더 확보한다면 작업량이야 늘겠지만 여기서 잠을 더 줄이는 건 무리였다. 정말 어떻게 봐도, 일 외에 내가 내 삶을 살아가는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자연히 회의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사는 거면, 대체 무엇을 위해, 무슨 이유로, 뭐 때문에 사는 거지? 살기 위해 노동하는 것인지, 노동하기 위해 살아 있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당연히 삶이 먼저고, 일은 그 삶을 부조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 40시간 근로는, 그리고 이렇게 높은 강도의 노동은 마치 삶의 목적이 일 그자체인 것처럼 변절시킨다. 삶의 목적이 과연 돈을 버는 것인가? 대체 이렇게 일만 하다 죽어야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일상을, 평생의 매일을 스스로 기획하지 못하고, 스스로 통제할 권한과 권리도 갖지 못하고, 급여를 제공하는 자에게 복종하며 억눌린 삶을 살아야 한다면 그게 목화 농장의 노예와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여행이나 소비와 같은 잠깐의 일탈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 오히려 지출을 메워야 하기 때문에 우리를 문제의 수렁으로 더 깊이 빠져 들게 만든다. 억눌린 삶은 분노를 낳는다. 우리는 홧김에 먹고 홧김에 사고 홧김에 돈을 쓰며 "이러려고 버는 건데 이 정도도 못 하냐"는 생각을 품게 된다. 그러나 화풀이는 내 삶의 주인을 나로 만들어 주지 않는다. 억압당한 자기 표현을 대신해 줄 수 없다. 오직 잠깐의 행복을 위해 평생을 희생해야 한다면 그건 강제된 금욕주의의 삶이다.
돈이 우리를 구제할 거라는 착각
이러한 문제의식은 비단 나만이 품고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다들 피용자의 삶을 벗어나 1인 기업가가 되든, 디지털 노마드가 되든, 파이어족이 되든 하기 위해 발버둥친다. 무식하게 일하지 말고 돈이 돈을 벌게 하란 말야. 그런 메세지를 담은 재테크 및 투자 관련 경제 서적과 유튜브, 블로그가 판을 친다. 마치 떼돈을 벌어 노동자의 지위에서 탈출하면 자유를 확보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건 반만 맞는 소리다.
누군가가 타인의 지휘와 감시 아래 노동해야 하는, 그러도록 떠밀린 자본주의 슬롯에서는 한 사람이 노동에서 벗어난다는 건 다른 사람에게 그 노동을 위탁한다는 의미다. 내가 회사에 출근하는 대신 크루즈 여행을 가기로 했다면, 그 크루즈 여행사 직원들과 크루즈 내의 뷔페 셰프들과 홀서버 직원들, 크루즈 승무원들의 노동에 빚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내가 밥을 해 먹는 대신 사 먹는다면, 그건 그 식당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노동에 빚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슬롯를 팽개쳐두고 내 돈으로 여행을 다닌다면, 그건 호텔 노동자들이 차려주는 밥과 그들이 마련해준 주거 공간에 빚진다는 소리다. 결국 사업 수완이 좋은 일부 소수만이 강제 노역에서 탈출할 수 있는 구조는 착취의 연쇄고리를 끊어내지 못한다.
심지어 돈은 언제든 잃을 수 있는 것이다. 당장은 경제적 자유를 누릴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언제 금융위기가 닥쳐오고, 언제 내 주식의 주가가 떨어지고, 언제 코인이 휴지가 될지 모른다. 돈은 덧없다. 한국슬롯는 강자동일시에 미친 사람들 뿐이라 내가 언제든 길바닥에 나앉을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하는 것 같다. 내가 설령 나를 먹여 살릴 수 없게 되더라도 안전할 수 있으려면 "바보야, 문제는 노오력이야!" 따위의 말을 해선 안 된다. 그러니 가난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고 방기해선 안 된다. 슬롯적 안전망을 다같이 구축해 놓아야만 그 누구도 외면과 고립으로 인해 굶어죽지 않을 수 있다.
돈은 내가 아니다. 인간이 살면서 죽을 때까지 진정 자기 몫으로서 온전히 가져갈 수 있는 것은 나를 먹여살릴, 그리고 내가 먹여 살려야 할 육신이며 내가 발 붙이고 살아가는 시간이다. 그런데 정작 육신은 회사에 묶여 일생을 같은 업무에 소진 당하고, 시간은 회사에 빼앗겨 하루가 그저 빨리 지나가길 고사하고 있다. 평일은 스킵해 버리고 싶고, 주말이 서둘러 오기만을 기다린다는 건 결국 오늘을 살아내는 시간이 소중하지 않다는 의미와도 상통한다.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으니 빠르게 흘려 보내고 싶은 것이고, 시간이 빨리 가버리길 바란다는 건 죽음을 앞당기고 싶다는 얘기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유를 살 돈이 아니라 자유 그 자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개개인 모두가 삶의 주권을 되찾고 진정한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 누구나 굶어죽지 않을 권리를 가지고 있어야 가능할 것이다. 잘난 사람만 살아남고 노력한 자만이 가치 있다는 생각은 낡디 낡은 고루한 사상에 불과하다. 존재에 자격을 두지 않는 것이 당연해져야 한다. 그래야 우리 모두의 존재를 위한 사투와 정신병이 종결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