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아이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와 파블로 네루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by박민영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가장 인상적으로 보여준 작품이다. 이 작품은 오랜 세월 동안 독자와 함께 나이를 먹어온 고전이다. 청소년기에 읽었을 때와, 대학생이 되어 다시 읽었을 때, 그리고 또 다른 삶의 국면에서 읽었을 때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명작이란 이렇게 독자와 함께 성장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새롭게 읽게 해 준 해석 가운데 하나는 분석심리학자 마리 루이제 폰 프란츠의 견해였다. 그는 어린 왕자를 작가 생텍쥐페리의 ‘내면의 아이’가 형상화된 존재로 보았다. 내면의 아이란 어린 시절의 감정이나 기억이 현재의 자아 안에 지속적으로 남아 있는 내면의 일부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어린 왕자는 단순한 동화 속 인물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무의식적 자아가 빚어낸 상징이라는 뜻이다.



이미지 출처: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삽화


작품 속 소행성은 어린 시절의 작은 세계를 연상시킨다. 그것은 우리가 자라온 공간, 이를 테면 내 방, 동네 골목, 학교 운동장과 같은 유년의 공간을 상징한다. 두 개의 화산과 장미는 어머니의 이미지와 연결되기도 한다. 실제로 생텍쥐페리의 어머니는 강한 개성과 섬세함을 지닌 인물로 알려져 있다. 장미의 까다로움은 연인이라기보다, 아이가 경험하는 엄마의 복합적인 얼굴일 수 있다.


어린 왕자가 만나는 왕, 허풍쟁이, 술꾼, 사업가, 점등인, 지리학자 등은 흔히 ‘어른들의 허위’를 상징한다고 읽혀 왔다. 그러나 폰 프란츠의 해석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작가 내면에 존재하는 여러 자아의 분화된 모습들이다. 우리의 내면 안에도 권력을 휘두르고 싶은 왕이 있고, 인정받고 싶은 허풍쟁이가 있으며, 부끄러움을 피하려는 술꾼이 있고, 계산적인 사업가가 있다. 그리고 정해진 일을 반복하는 점등인과 머릿속으로만 세상을 이해하는 지리학자도 있다. 작품 속 인물은 내면의 다양한 자아가 인격화된 형상이다.


요즘 들어 점등인과 지리학자에 마음이 이끌린다. 학생들보다 일찍 강의실에 도착하여 전자 교탁의 스위치를 누를 때, 혹은 강의가 끝난 뒤 전원을 끄고 천천히 뒷정리를 할 때 나는 문득 점등인을 떠올린다. 연구실에서는 바카라상물림 지리학자가 생각난다. 그 인물이 내 안의 어떤 자아를 건드렸으리라.


어린 왕자의 여행은 결국 자기 탐색의 여정이다. 작은 별을 떠나 여러 존재를 만나고, 다시 돌아오는 경로는 성찰을 통해 성숙한 자아로 거듭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을 다시 읽는 것은 곧 자신의 여러 자아를 점검하는 일이 될 것이다.


나였던 그 아이


파블로 네루다는 칠레의 민중 시인이다. 197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정현종이 번역한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는 시를 사랑하는 이들의 필독서이고, 그의 생애를 소재로 한 영화 <일 포스티노>는 대학에서 시 강의 시간에 단골로 상영해 주는 작품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네루다가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2013년 여름, 광화문 교보빌딩 광고판에 올라온 시 한 구절 덕분이다.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에 있을까/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네루다 시집 '질문의 바카라'의 44번 시의 부분이다. 전문은 이렇다.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그는 알까,
그리고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왜 우리는 헤어지기 위해 자라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을 썼을까?

내 어린 시절이 죽었을 때
왜 우리는 둘 다 죽지 않았을까?

만일 내 영혼이 떨어져 나간다면
왜 내 해골은 나를 쫒는 거지?

-파블로 네루다, '질문의 바카라' 44


어린 시절의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완전히 사라졌는가, 아니면 여전히 내 안에서 말을 걸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은 단순히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가 아닌 존재론적 물음이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그 아이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아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이후 성장하면서 우리는 헤어졌고 아이는 점차 잊혔다. 그러나 그 아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다. 다만 말할 기회를 잃고 내 안에 숨어 있을 뿐이다. 때로는 칭얼거리고, 때로는 이유 없이 서운해하며, 때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으로 언뜻언뜻 모습을 드러낸다. 성숙하지 못한 감정으로 치부하고 억누르지만, 사실 돌봄을 요구하는 신호일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자장가」를 떠올려 볼 수 있다.


누군가 노래 불러 잠재우고 싶다.
언제나 그 곁에 앉아 있고 싶다.
너를 어르며 조용히 노래하고
자나 깨나 같이 있고 싶다.
지난밤이 추웠음을 아는,
이 집에서 단 한 사람이고 싶다.
내 가슴과 이 세상과 숲에
가만히 귀 기울이고 싶다.
시계들은 종을 쳐서 서로를 부르고
사람들은 시간의 바닥을 본다.
저 아래 아직 낯선 사나이 하나 지나며
낯선 개의 잠을 깨운다.
그 뒤엔 적막. 네 몸에
나의 눈을 크게 얹으며
그 눈은 너를 부드럽게 잡았다 살며시 놓아준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일 때면.

-라이너 마리아 릴케, 「자장가」


이 시에서 화자는 누군가를 어르며 잠재우고 싶다고 말한다. 너를 어르며 조용히 노래하고, 자나 깨나 같이 있고 싶다고도 말한다. 여기서 너는 실제 어린아이 일 수도 있지만, 내면의 아이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아이의 울음은 잠투정에 가까운 칭얼거림이다. 저 아래 편에 낯선 사나이가 지나가고 개가 잠을 깨고, 그렇게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밤의 풍경은 아이의 불안을 암시한다. 화자는 그 곁에 앉아 눈으로 아이를 부드럽게 붙잡았다가 살며시 놓아준다. 지켜보는 돌봄이다.


이 장면은 내면 작업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우리는 마음속 아이를 억지로 침묵시키는 대신, 조용히 곁에 앉아 어르고 달래주어야 한다. “지난밤이 추웠음을 아는/이 집에서 단 한 사람이고 싶다”는 구절은, 아이의 상처를 기억하는 유일한 증인이 되고자 하는 소망을 드러낸다. 자, 그럼 아이의 칭얼거림에 귀 기울여 보자. 그 아이는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부캐 만들기


문학 작품에서 표현된 내면의 아이를 살펴보았다. 이제 그 아이를 발견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조금씩 키워보려 한다. 비유하자면 게임에서 하나의 캐릭터를 성장시키는 일과 같다. 우리는 성인이 되었고, 어느 정도 세상을 견딜 수 있는 힘도 갖추었다. 이제는 마음속에서 여전히 미성숙한 채로 남아 있는 그 아이를 돌볼 차례다. 그 아이를 성장시켜 당신의 부캐(부캐릭터)로 만들어 보자.


대중문화에서 부캐는 하나의 유행이 되고 있다. 예컨대 이수지는 다양한 부캐를 통해 전혀 다른 인물을 연기하고, 유재석은 ‘유산슬’이라는 또 다른 자아를 만들어 트로트 가수로 활동했었다. 사실 우리도 이미 여러 개의 자아를 지닌 채 살아가고 있다. 다만 그것을 의식적으로 이름 붙이거나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을 뿐이다.


이 글을 통해 우리가 만들어볼 부캐는 ‘내면의 아이가 성장한 자아’이다. '어린 왕자'와 네루다, 릴케의 시로 만났던 그 아이를, 지금의 내 안에서 다시 만나 보듬고 성장시키는 것이다. 그 아이는 나와 닮았을 수도 있고, 전혀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 안에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명의 어린아이가 존재할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 존재를 외면하지 않고, 인격화하여 돌보는 태도이다. 릴케의 시에 나온 것처럼 조용히 곁에 앉아 노래를 불러주거나 부드럽게 지켜보는 것으로 시작하면 된다.


마음속 아이는 우리가 외면하면 더 깊숙이 숨는다. 이제 그 아이를 불러내어, 다독이고, 이름을 붙이고, 함께 성장시켜 보면 어떨까.

월, 목 연재
이전 11화내 안의 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