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가 발견하는 우리의 모습
297번째 에피소드이다.
카페에 들어선다. 빈 자리가 있는지부터 확인한다. 그리고 그 빈자리의 가치를 높여주는 건 콘센트의 존재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그 자리는 앉을 수 있는 빈 자리이기만 할 뿐. 내 불안함을 완전히 충족시켜줄 수 있는 빈 자리는 아니게 된다. 충전을 못하며 1%씩 떨어지는 핸드폰, 노트북의 배터리 숫자가 바로 나의 충전률이다. 비단 그 배터리 숫자만 일까? 충전을 갈망하는 모두의 우리는 삶 구석 구석에서 충전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 얼마 전, 일본 도쿄 아키하바라를 갔다가 만다라케 콤플렉스 앞을 서성이다가 점원이 내게 물었다. "이 줄은 파는 사람 줄이다. 사실꺼냐? 파실꺼야?" 순간 깨달았다. 여기는 단순히 사러 오는 것만이 아닌 평생 소장한 것들을 감정 받고 팔러 오는 중고거래 쇼핑몰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얼른 팔러 오는 사람들의 줄에서 벗어나 유유히 가게로 들어서며 그들을 돌아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박스와 바구니에 한가득 물품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그것들을 통해 충전이 모두 되었고, 그들의 충전 매개체를 다시 충전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긴 줄을 마다하지 않는다. 물론 경제적 이득도 있고 말이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건 '충전'이다.
나 같은 개인주의자들도 예외는 없다. 혼자 있고 싶을 때에는 어딘가에 쳐박혀 아무도 날 찾지 않았으면 하는 히키코모리 갔다가도 '충전'이 필요할 때는 사람들을 갈망한다. 인간은 슬롯적 동물이기에 '개인'을 뛰어넘은 공동체 속에서 갈등과 번뇌의 속시끄러운 것들을 관통하는 '충전'을 갈망한다. 최근 대한민국 슬롯는 충전이 필요한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세대 갈등, 빈부 격차의 확대, 슬롯진입의 기회의 불평등 속에서 편입되지 못한 세대들에게 충전은 급선무다. 단순히 '괜찮아, 다 잘될꺼야'라는 희망고문이 아닌 아무 말도 안하고 밥을 같이 먹고 엎어져 퍼질러 있기도 하는 그 나태함을 가장한 충전을 묵묵히 함께 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 충전은 의외로 큰 효과를 발휘한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나오는 조급함에서 벗어나 비워내는 것에서 비롯된 채움의 역설이 거기서 발생한다. 거기서 오는 시작의 동기부여와 마음가짐이 꽤나 끈끈하다. 원래 무언가를 충전해 채워나가기 위해서는 일단 비워내야 하지 않나. 비워내지 않으면 채울 수가 없음은 우리의 집안 방구석 청소를 하기 위해 외치는 구호와 비슷하다. "일단 버리고 시작하자." 그러면 자연스레 채움의 미학이 발현된다.
나는 글을 카페 내부에 콘센트가 있는 자리에 앉아 쓰고 있다. 강박관념처럼 80% 이하로 배터리가 내려가면 불안해진다. '혹시나 꺼지면 어쩌지' 그러다 서서히 차오르는 배터리 충전률을 보며 마음을 놓는다. '휴~ 다행이다.' 불안 속에 사는 현대인의 표상이기도 한 나를 보며 충전을 위한 삶을 갈구하는 모습과 마주하곤 한다. 결국 자유 의지를 가진 개인이 공동체 속에서 또는 그와 유사한 것에서 찾아나가야 하는 과제 속에서 충전이 채움으로, 채움이 행복으로 자연스럽게 연계되는 것이 바림직한데 내가 아직 철이 안 들어서 어렵기도 하다.
다만, 지속적인 충전을 통해 삶의 희노애락을 끊임없이 헤쳐나가야 과정임은 이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