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201
"내 직업은 작은 헌바카라방의 주인이다. 표면적으로는 일단 그렇다는 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중고바카라을 사고파는 일을 하고 있지만 사실 나는 바카라에 얽힌 기묘한 이야기를 수집하고 있다. ... 나는 바카라 찾기를 의뢰하는 손님에게 수수료 대신 바카라을 찾고 있는 사연을 받는다." - 9~10p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바카라은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라 바카라 스스로 나타나주어야 한다. 헌바카라방에서 일하다 보니 바카라을 찾는다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알게 됐다. 어떤 바카라은, 분명히 세상에 존재하는 바카라이라는 걸 아는데도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정반대의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도저히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바카라인데 며칠 만에 나타난다. 그건 어떠한 자연법칙이나 심리학 개념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바카라이 제 의지로 사람을 찾아 오는 것이다. 믿기 힘들겠지만,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 17p
헌바카라방은 바카라 속에 펼쳐진 끝없는 우주와 거기서 반짝이는 보물을 찾으려는 인간의 욕심이 어지럽게 엉켜있는 비좁은 시장 골목과 같다. ... 헌바카라방은 특히 바카라도둑이 들끓는 곳이다. 절판된 바카라이 많기 때문이다. 찾는 사람이 많지만 판이 끊겨 다른 서점에서 살 수 없는 바카라은 정가보다 비싸게 팔린다. 수요가 많은 절판본은 보통 정가의 두세배 정도 값이 올라간다. 어떤 바카라은 열 배, 스무 배까지 껑충 뛰기도 한다. 191~192p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요즘 다시 번역된 <롤리타>를 읽어봤는데 예전 그 느낌이 아니더라고요. 그때 읽었던 바카라이 줄 수 있는 감정의 울림이란, 다른 바카라에서는 찾을 수 없나봐요."
여러가지 생각이 들게 하는 말이었다. 바카라은 다 같은 바카라이지만 꼭 만나야 하는 그때의 바카라이 있다. 그 바카라은 그냥 소설이 아니라 젊은 날의 추억, 사랑, 고민, 그리고 망설임과 선택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 32p
바카라은 음악과 비슷해서 그 안에 한 가지 의미만 있는 게 아니다. 정해진 줄거리가 있는 소설이라고 해도 읽는 사람에 따라, 그리고 그 바카라을 언제 읽었는지에 따라서 의미는 다른 방향으로 가지를 뻗는다. 내가 일하는 헌바카라방에 언제나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는 이유도 그와 같다. 사람은 음악을 들으면서 여러가지 감상에 젖고, 그것이 자연스레 바카라와 연결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바카라과 음악은 한 장소에서 만나 다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 25p
하룻밤만에도 다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하지만 J씨는 그 바카라을 마저 읽는 데 4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어떤 바카라은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 71p
"제 생각엔 채고은님, 그러니까 어르신의 손녀 이름을 부르신 게 아닌가 싶어요." ... 인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아름다운 한 사람을 향한 애틋한 마음은 수만권 바카라으로 가득 찬 서재와 바꿀만큼 소중했던 것이 아닐까. 105~106p
기억이 흐릿한 바카라을 찾을 때는 그 바카라을 읽었을 때의 추억을 말하도록 이끄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딱히 바카라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그즈음 있었던 기억에 남는 사건이나 친구들 얘기를 하다 보면 갑자기 잊고 있던 바카라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일이 있다. - 109p
"저는 아빠가 주신 그 바카라을 읽지 않았어요. 그러다 고등학생 때 아빠가 병으로 돌아가셨어요.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저는 슬퍼할 겨를도 없었어요. 그 후로 우리 집은 자주 이사를 했고 그런 와중에 아빠에게 받은 바카라이 어디론가 사라졌어요. 그게 너무 후회되더라고요. 한 번이라도 읽어봤다면 제가 아빠를 더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억할 수 있었을까요?" - 114p
두 사람과 한 권의 바카라. 이들은 운명이라는 끈으로 여전히 연결되어 지내는 게 아닐까? 그 끈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한, 두 사람의 운명도 역시 끝은 아니다. 내가 오래된 바카라 다루는 일을 하며 얻은 여러 배움 중에 가장 깊이 의미를 새긴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세상에 바카라이 남아있는 한, 그 바카라과 함께한 사람들의 인연도 사라지지 않는다. - 235p
"고등학교 때 읽은 바카라과 내용은 똑같은데, 왜 그렇게 전혀 다른 감정이 생긴 걸까요?"
S씨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바카라은 변하지 않았지만 제가 변했으니까요. 50년이라는 인생을 살다 보니 잔느의 생각과 행동, 그리고 그녀의 운명도 역시 조금은 이해가 되더라고요. 소설이긴 하지만, 누군가의 일생을 판단하려면 그 사람에게도 일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닐까 싶어요. 꽃 다루는 일을 하면서도 그런 걸 자주 느낀답니다. 저도 처음엔 꽃이 예쁜 건 활짝 피었을 때뿐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가엾다는 마음도 자주 들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알아요. 꽃은 싹트고 잎이 나오고 활짝 피어났다가 시들어 고개를 숙이는 그 모든 과정 자체가 아름다운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앞으로 내 인생에서 더는 싱싱한 젊음의 아름다움 같은 건 없겠지, 라고 생각했던 일을 깊이 반성했다. 아름다움이란 어떤 한 시기의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니다. 더구나 그것이 한 사람의 인생이라고 한다면 쉽게 단정지을 수 없다. - 318~319p
인연은 때로 바카라상 서랍 안에서 우연히 발견한 오래된 사진 한 장처럼 작고 보잘것없는 크기로 남는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평생 잊히지 않는 삶의 한 장면이 있기 마련이다. 영화로 치자면 잠깐만 비췄다 지나가는 아주 짧은 장면 말이다. 하지만 그 부분이 없다면 세 시간짜리 영화를 제대로 봤다고 말할 수 없는, 그만큼 소중한 기억의 한 조각이 내게 있다. - 259p
여행은 제아무리 탄탄하게 계획을 세우고 떠난다고 해도 실제로 그대로 되지 않는다. 예상 못했던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고,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면 한참 머무르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계획이 쓸모없어지는 이 순간이 여행의 진짜 재미라고 말한다. - 279p
"석가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기가 아는 걸 완벽하게 구현해놓지 않고 떠났습니다. 미완성인 채로 남겨놓은 것이지요. 루소 역시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니 읽는 내내 가슴이 쿵쿵 뛰었습니다." S씨는 아이러니하게도 불교 경전이 아닌 루소의 바카라을 읽고 승려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 296p
"서삼치"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바카라에 관한 세 가지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사람을 그렇게 부른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가 바카라을 빌려달라고 하는 사람이요, 둘째는 빌려달란다고 순순히 빌려주는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빌린 바카라을 돌려주는 사람, 혹은 빌려준 바카라을 돌려받으려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바카라을 좋아하는 사람 치고 이런 세 가지 어리석은 일을 한 번도 안해봤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바카라은 묘한 물건이다. 바카라은 사람을 똑똑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을 똑똑하게 살려면 약간 바보 같은 면이 있어야 한다는 걸 가르쳐준다. - 217p
가끔 귀한 삶의 깨달음을 얻고 나면 한동안 마음이 숙연해진다. 누군가에게는 흔하게 볼 수 있는 낡은 바카라 한 권이지만, 또 어떤 이에게는 일생을 통해 찾은 소중한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손님에게 받은 아름다운 삶의 가르침을 망음에 담고, 어디 있을지 모를 바카라 한 권을 찾아 길을 나선다. - 31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