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 내외는 동네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호인이었다.
바깥 어르신은 키가 훌쩍 크고 몸이 호리호리했으며, 무엇보다 부지런했다. 눈만 뜨면 지게를 지고 들로 나갔다. 새벽부터 하루를 일로 시작했지만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다. 시골집에서 흔히 키우던 돼지 한 마리조차 없었다. 얼굴에는 늘 거무죽죽하게 병색이 어렸다. 먹고살기 고된 시절에는 부지런함이 곧 생계였다.
가을걷이가 시작되면 바깥 어르신은 이른 아침부터 논으로 나갔다. 낫으로 베어 놓은 볏단을 지게에 높다랗게 얹고 논과 집을 쉼 없이 오갔다. 벼를 베어 낸 들판에는 마른 볏짚 냄새가 감돌고, 발길이 스칠 때마다 검불이 바스락거렸다.
해거름이면 온몸에 볏짚 티끌을 묻힌 채 토방 끝에 앉아 지게를 내려놓았다. 저녁밥 대신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의 주둥이를 입에 대고 막걸리를 들이켰다. 시어빠진 깍두기 한 조각을 집어 먹고, 쌀겨에 묻어 떫은맛을 우린 감 한 알을 베어 물며 하루의 시름도 함께 삼켰다.
그러던 어느 날, 마루 동쪽 끝에 상청이 차려졌다. 영정사진 속에는 바깥 어르신이 있었다. 상청 둘레에는 하얀 광목천이 삼면으로 드리워져 있었다. 장례가 끝난 뒤에도 상청은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어린 나는 그 안에 시신이 놓인 것만 같아 무서웠다. 그 집에 심부름이라도 가게 되면 일부러 상청 쪽을 보지 않은 채 서둘러 일을 마치고 도망치듯 나왔다.
남겨진 부인은 키가 아담했고, 동글동글한 얼굴에 뽀글뽀글한 반백 머리를 하고 있었다. 움직임은 느릿했지만 집 안에는 노상 부인의 노랫가락이 흘렀다. 막걸리를 한 잔 마시면 흥을 주체하지 못하고 노래로 풀어냈다. 슬픈 일이 있어도 신세타령보다 흥겨운 노래가 먼저 나왔다.
상한 냄새가 막 올라오기 시작한 반찬 앞에서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
“그거 버리믄 죄여. 껄껄껄껄.”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너털웃음에 하루의 시름도 슬며시 눅었다. 입에서는 걸걸한 욕도 나왔지만, 그마저 둥글게 들려 사람들을 웃게 했다. 부인은 푸접이 있어 누구든 스스럼없이 곁을 내주었다. 흥이 오르면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추임새를 넣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 못 노나니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라.”
그 댁에는 딸이 여섯 있었다. 여섯 딸 끝에 마침내 아들을 얻었다. 형편이 어려워 딸들은 제대로 배우지 못했고, 일찍 집을 떠나 돈을 벌거나 어린 나이에 결혼했다. 산업화의 물결이 밀려들면서 농촌의 젊은이들이 하나둘 도시로 떠나던 때였다.
큰딸은 요리사를 만나 우여곡절 끝에 하와이로 건너갔다.
“우리 딸 미국에 살어.”
부인은 이 말을 자랑처럼 입에 달고 살았다.
딸들의 삶에도 크고 작은 일이 끊이지 않았다. 혼인살이가 순탄치 않아 친정으로 몸을 피했다가 다시 돌아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부인은 삶이 고달플수록 노래를 더 크게 불렀다.
부인은 딸들에게 시키지 못한 공부를 막내아들에게만은 끝까지 시키려 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아들은 집안의 모든 기대를 받으며 자랐다.
“허허허허. 우리 막둥이 대핵교 다닌당게.”
세월이 흐르면서 흙벽 집은 점점 기울어 갔다. 마침내 집이 무너지고, 그 자리에 방 두 칸과 거실, 입식 부엌과 실내 화장실을 갖춘 양옥집이 들어섰다. 하와이에 있던 큰딸이 식당에서 번 돈을 보내 지은 집이었다.
새집에 들어가던 날 밤, 부인의 노랫소리는 늦도록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 무렵 증권으로 큰돈을 벌었다는 이야기가 시골까지 심심찮게 들려왔다. 아들은 그 흐름을 붙잡으려 했다. 새집을 담보로 돈을 빌려 증권에 투자했다. 어느 날부터 아들은 가뭇없이 모습을 감추었고, 대신 등기우편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까막눈인 부인은 봉투 안에 무슨 말이 적혀 있는지 알지 못했다. 남은 것은 등기우편과 날로 불어나는 근심뿐이었다.
결국 새집은 지은 지 삼 년 만에 경매로 넘어갔다.
갈 곳을 잃은 부인은 지역의 양로 시설인 아가페정양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보따리 하나만 들고 집을 떠나던 날, 부인의 통곡은 바깥 어르신의 상청 앞에서보다 더 서글펐다.
정양원에 들어간 뒤에도 동네 사람들은 종종 면회를 갔다. 걱정과 달리 부인은 그곳에서도 씩씩하게 버티고 있었다. 소식 끊긴 아들과 되찾을 집을 기다리는 마음이 부인을 붙들고 있는 듯했다.
어느 날, 부인은 면회 온 동네 사람들을 따라 오랜만에 마실을 나섰다. 그러다 발걸음이 살던 동네까지 이어졌다. 집 앞에 이르자 부인은 길바닥에 주저앉아 목 놓아 울었다.
하룻밤을 동네 친구 집에서 묵고 다시 정양원으로 돌아갔다.
부인이 동네에 다녀간 것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듬해 겨울이 끝나 갈 무렵,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세월이 흐른 뒤 정양원 일대는 아가페 정원이라는 이름으로 시민에게 문을 열었다. 잘 가꿔진 정원 안에는 부인이 생의 끝자락을 보냈던 정양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가을볕 아래 정원은 고요했다. 한때 마을 고샅을 누비며 노래하고 웃던 부인이 이곳에서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돌아서는 길, 정원의 메타세쿼이아 사이로 늦은 햇살이 길게 내려앉고 있었다.
50년 만에 시민에게 공개된 정원이 있다. '아가페 정원'. 윗글의 부인이 소풍을 끝낸 바로 그 요양시설이 포함된 정원이다.
아가페 정원
태동시기 - 1970년
설립자 - 서정수(알렉시오) 신부
소재지 - 전북 익산시(2021년 전라북도 민간정원 4호로 지정)
아가페정원시설 - 아가페노인전문요양원, 아가페정양원, 아가페카페
민간정원이란 개인이나 법인, 단체가 조성한 정원을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도록 시. 도에 등록해 개방하고 있는 정원을 말한다.
아가페 정원은 한 사제의 휴머니즘에서 태동했다. 거리의 부랑자를 동등한 인격체로 대접한 사제의 아름다운 선의가 그 시초였다. 메타세쿼이아, 섬잣나무, 공작단풍 등 수목 19종 5,722그루가 등재되어 있다. 50년 넘게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어 '비밀의 정원'으로 불리기도 했다. 전라북도 민간정원 4호로 지정되기까지 아가페정원은 50년의 역사를 거쳐 왔다.
‘아가페정양원’이 태동한 것은 1970년도다. 고인이 된 서정수(알렉시오) 신부는 익산 시내를 걷다가 발에 차이는 거적때기가 있어 들추어보았다. 그 안에는 부피 없이 납작한 시체 한 구가 누워 있었다. 길에서 유리걸식하다가 병들어 사망한 노인이었다.
1인당 GDP가 254달러에 머물던 시절이니 국가 차원의 복지는 기대할 수 없었다. 알렉시오 신부는 한 사람의 인생이 이토록 비참하게 끝난다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길 위에서 삶을 마치는 사람들과 함께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사재를 털어 갈 곳 없는 노인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하였다.
아가페정양원(靜養院)은 '고요하게 쉬면서 조건없는 사랑(아가페)을 나누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원훈(院訓) 또한 '가족으로 살자'이다.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서 살려면 서로 가족처럼 사랑하고 이해하며 포용해야 한다는 아가페정신이 깃들어 있다.
아가페정양원이 유명해진 이유는 바로 '정원'때문이다. 정원은 정양원의 자급자족을 위해 고민한 결과다. 기부금 만으로는 운영이 어려워 오갈 곳 없는 어르신들을 보살피기 위해 처음에는 농사를 지었다. 일할 사람은 적고 일은 많으니 포도나무를 심어 포도를 출하하기로 했다. 그러나 출하 직전, 포도가 무르지 않게 약을 쳐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알렉시오 신부는 "사람이 바로 내일모레 먹을 텐데 어떻게 약을 치겠냐."면서 이는 간접살인이라 규정하고 포도나무를 모두 정리해 버렸다. 그렇게 생명을 위하는 마음을 놓지 않고 방도를 찾은 결과가 바로 '나무'였다.
나무를 심고 키워 파는 자립 목적의 조경사업을 시작하였다. 내장산에는 단풍나무, 부잣집들에는 향나무를 팔았다. 처음에는 참담한 일을 많이 겪었다고 한다. 귀한 수종의 나무가 벌판에 널려 있다 보니 사람 손을 타곤 했다. 너도나도 나무를 캐갔다. 자고 일어나면 나무가 사라졌다. 의식 수준이 낮았던 시절이었다.
메타세쿼이아 나무를 울타리처럼 심었다. 그렇게 더러는 팔고 더러는 남겨둔 나무들이 50년 동안 자라며 숲을 이뤘다. 이것이 아가페정양원의 치유정원으로, 지역의 숨겨진 비경으로 알려진 아가페정원의 시작이었다.
1985년 서정수 신부가 타계한 후에는 박영옥 이사장이 아가페정양원을 이끌어 오고 있다.
박영옥(93세) 이사장이 전 재산을 헌납하여 지금의 부지 3만 5000평을 확보하였다. 2011년에는 최명옥 원장이 부임하여 연로한 박 이사장을 도왔다. 시설 내 어르신들의 건강하고 행복한 노후를 위해 자연을 벗삼을 수 있도록 수목을 관리하고 있다.
코로나19가 극성을 부리던 여름, 장마 피해를 입은 지역을 둘러보러 온 지자체 단체장이 아가페정원의 우거진 나무를 보고 찾아갔다. 숲을 시민들과 공유하자는 시장의 긴 설득 끝에 시민들의 힐링장소로 재 탄생하게 된다.
정원 자체가 수목원처럼 가꾸어진 늘 푸른 숲을 시민들에게 개방하여 휴식과 정서에 도움을 주고자 2021년 3월 민간정원으로 등록했다. 아가페정원이 시민에게 선을 보이기까지 지역의 시청, 삼립조합, 푸른 숲 가꾸기 운동본부 등이 정비사업을 도왔고 2021년 9월 비밀의 정원이 시민들 쉼터공간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입장료를 받아도 된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무료로 오픈했다.
최명옥원장은 " 정양원운영처럼 신부님이 나무를 우거지게 해 두신 것 역시 시민들에게는 '복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있었죠. 그리고 시민들이 한창 어려울 때 문을 열었기 때문에 서로 건강을 챙기며 한 사람이라도 여기서 잘 회복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어요." 라며 무료 운영의 뜻을 밝혔다.
2023년 정양원장을 퇴임한 최명옥 전 원장은 나무의 지혜와 이야기를 전하는 정원지기, 일꾼, 정원 안내자이면서 방문객의 사진을 찍어주는 사진사로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다.
"자연은 의사가 못하는 치료를 할 수도 있어요. 누구든 우리 정원을 보러 와서 '이런 선한 마음으로 만든 정원도 있구나' 하며 포근하고 선한 마음, 사랑의 마음을 안고 돌아가 주변에 전하길 바라요."
정원의 이름 '아가페'의 뜻을 이어받아 나무와 꽃을 가꾼 최명옥 전 원장의 소회 또한 대가 없이 베푸는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다.
부모자식 간에도 이권다툼이 있고 급기야 생명까지도 해치는 인면수심의 사건들이 비일비재한 세상이다. 전능자의 사랑 외에 아가페사랑을 운운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싶을 정도로 세상이 무서워졌다. 그러나 이런 세상에도 더 이상 부패하지 않도록 소금의 역할을 하는 개인과 단체가 있고 어두운 곳을 밝히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이 악(惡)으로 물들어 갈지라도 사랑과 자비로 말없이 세상을 물들이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반드시 있다.
'아가페정원'의 50년 역사와 현재가 누군가에게 살아갈만한 이유가 되는 곳, 아름다운 세상을 드러내는 작은 빛으로 오래 밝혀지기를 기원한다.
덧)
아가페정원의 최근 초여름 풍경을 소개하려고 어제 오전시간을 내서 다시 방문했습니다.
본문글 아래 첨부하려했으나 글 분량이 너무 길어지게 됩니다.
하는 수 없이 따로 떼어 부록으로 다음 주 연재글에 소개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