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의 피아노] 김진영 2nd (부제 : 삶의 방향을 정하는 방식)
"이렇게 살면 되겠구나"
바카라은 누군가의 삶의 방향을 정하기도 한다. 수많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말한다. 이렇게 처신해야 한다고. 저렇게 살아야 한다고. 살아 있는 자의 말은 생동감이 있다. 우리 눈앞에서 느껴지는 화자의 시선과 주름이 움직이는 표정의 변화 그리고 목소리의 높낮이가 만드는 리듬과 화음 속에서 우리는 인간적인 떨림을 느낀다. 거기에 그 화자가 쓰는 언어의 의미가 시의적절하면 우리의 마음속에 울림이 퍼진다. 생동감 있는 대화와 토론이 우리를 움직인다.
우리가 삶 속에서 또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대화와 토론을 이어나가야 할 이유일 것이다.
한 철학자의 죽음이 남긴 글이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삶의 방향을 만들어 준 모양이다. 바카라을 선정하고 토론을 이끈 한 호스트의 한 줄 평이 또 하나의 상념을 던졌다.
“글쓰기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그건 타자를 위한 것이라고 나는 말했다.”
-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202장 중에서 -
삶의 멘토를 만나고 싶은 자의 희망은 종종 그 살아있는 멘토의 욕망을 채워주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살아있는 자의 글보다는 죽은 자의 글을 좀 더 신뢰한다. 그건 죽은 자는 변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살아있음(生)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 속에 놓여 있다. 우리가 살아있는 자에게서 삶을 조언과 배움을 구하면 그 조언과 배움에 실망(배신감)하거나 후회(잘못 선택)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이 실망과 후회는 두 가지의 경우로 볼 수 있는데 첫 번째는 그 멘토가 자신이 가르친 데로 삶을 살지 않는 경우이거나 자신이 다른 더 나은(정확히는 자신과 어울리는) 멘토를 만났기 때문이다.
이건 살아있는 두 사람(스승과 제가)의 삶과 관계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의 변화가 엇갈리는 지점에서 변심한다. 이건 생(生)이 각자 다른 삶을 마주하며 동시대를 살기 때문에 벌어지는 불가피한 일이다.
우리는 그것을 ‘변심’과 ‘배신’ 혹은 ‘배교’과 같은 부정적인 단어로 인식하고 상처로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이건 상대에겐 변화, 쇄신, 회심 일수도 있다. 과거 수많은 위인들이 그 과정을 거치며 자신의 길을 개척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을 배신했고 하이데거가 후설을 배신했고 한나 아렌트가 하이데거의 변심에 괴로워했다. 서로가 보고 느끼고 살아온 환경과 관계 혹은 불가피한 삶의 강요와 억압이 그 자의 생각과 사상을 변하게 만든다.
이 과정은 실로 의미 있고 중요하다. 인간의 정신문명이 다양하고 풍부하게 발전해 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스승의 철학과 생각을 이어받아 더 발전시킬 수 있지 않느냐고. 맞다. 누군가는 스승의 철학을 좀 더 체계적이고 입체적으로 계승 발전시키기도 한다. 과거 수많은 성인과 위인들 문하에서 그 스승의 학문을 발전시킨 제자들이 적지 않다. 이것은 학문의 계보를 만든다. 이건 아마도 한 종이 진화하는 과정과 같을 것이다. 하지만 진화가 반드시 성장이나 개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처한 환경에 적응한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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