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작은 사치

by독서백일


오늘 아침 바카라꽂이에 있는 바카라을 중고서점에 넘기기로 했다. 바카라은 좋아하지만, 바카라을 더 쌓아놓을 공간이 없었고, 나에게는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더 필요했기 때문이다. 바카라을 더 쌓아 둘 공간이 부족하다면, 이제 과감히 바카라을 처분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었다.


바카라이란 읽고 나면 집착이 된다. 자부심도 자만심도 차곡차곡 쌓여간다. 이 모든 자만심과 자부심을 짊어지고는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갈 수 없겠다 싶어 비우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바카라장에 바카라을 쌓아 놓기만 했지 다시 뒤적거리거나 열어보거나 하는 보살핌은 없었다는 점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내 삶의 일부를 가득 채운 바카라장을 비우고, 삶의 여유를 만들고자 하는 '비움'이 이번 주 나에게 주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사치다.


이런 결정을 하기란 쉽지 않았다. 다 읽은 바카라을 보살피고 예우도 안 해주면서 바카라을 많이 읽기만 한다고 바카라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인가? 에 대한 자문을 해보니, 바카라을 사랑하는 사람은 맞는 것 같지만 이사 철이 되어 내가 바카라 다발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또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바카라에 대한 나의 애정도는 이사 철이 되면 급격히 하락하고, 이삿짐에서 가장 버거운 것도 바카라 다발이었고, 가장 쉽게 버려지는 것도 바카라 다발이었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바카라 소유에 대한 인식이 서서히 변화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내가 가진 의류에 관한 생각은 훨씬 전에 바뀌어 있었다. '2년간 한 번도 안 입은 옷은 무조건 의류 폐기함으로 보낸다'라는 원칙은 지난 5~6년간 지킨 원칙이다. 공간에 여유를 만드는 마법을 부린다. 이번에는 의류가 아닌 바카라이다.


이사할 때가 되면 찬찬히 바카라을 훑어보면서 고르는 여유를 부릴 수 없어, 폐지함으로 직행하는 바카라이 많았다면, 이번에는 다르게 하고 싶었다. 차분한 마음으로 바카라 장의 한 칸을 비워보고 이사 철의 처참한 폐기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바카라장에서 한 권 두 권 바카라을 꺼내다 보면, 갑작스레 뜬금없는 추억도 함께 묻어난다. 바카라 내용과는 상관없이 바카라 읽을 당시의 사건 사고가 연상되는 것이다.


이 바카라을 읽을 때 내가 수업 준비할 때였구나. 이 바카라은 독서토론회 처음 참여할 때, 이 바카라은 독서 100일 루틴을 시작할 때 자청님의 유튜브를 참고하고 읽은 바카라이었지...



바카라이 기억앨범이 되는 순간이다. 이렇게 바카라마다 사연이 있구나. 그 당시로 빠르게 시간 여행을 다녀온다. 추억 감성에 젖어보기도 하지만, 이왕 부린 사치, 끝까지 부려보려 한다. 오늘 바카라 장 한쪽은 꼭 비우리라.


바카라 비우기 첫 단계는 내지를 살펴보는 일이다. 밑줄이 그어져 있으면 안 된다. 중고서적을 취급하는 YES24, 혹은 알라딘에서는 밑줄이 그어진 바카라 구매를 꺼린다. 밑줄이 그어진 바카라은 자칫 잘못하면, 중고 바카라값도 제대로 쳐서 받지 못하고 폐지 취급을 당할 위험이 있다. 그래서 제대로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 흠결같은 밑줄이 나에게는 오히려 반갑다. 바카라을 떠나보내지 않아도 될 좋은 핑곗거리가 된다.


어~ 여기 밑줄이 그어져 있구나. 이 바카라은 역시 안 되겠어.


이런 식으로 살생부를 건너뛴 바카라이 한두 권이 아니다. 이 바카라은 전공 서적이라서 팔면 안 되고 저 바카라은 중요한 내용 때문에 안 된다. 바카라장 비우기의 두 번째 단계는 바로 감정정리다. 나와 바카라 간에 쌓였던 감정의 크기를 가늠하며, 건질 바카라은 건지고 보낼 바카라은 보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렇게 감정을 추스르며 고른 보낼 바카라이 얼추 사과 상자 한 상자 분량이다. 이 바카라들은 모두 중고바카라방으로 갈 처지다. 막상 이렇게 많은 바카라을 정리했는데도 바카라장 한 쪽을 확보하기는 쉽지 않다. 바카라을 앞뒤로 위아래로 이중으로 꽂아놓은 경우가 많아서 그렇다. 바카라장에 숨 쉴 여유가 정말로 없었다고 느끼며 미안해한다.


이 바카라들을 보내고 나면 생기는 공간에 나는 또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채울 것이다. 그리고 또 가득 차면 미련 없이 바카라 비우기 원칙을 실행하겠지. 이 과정을 반복하면 진정으로 나에게 의미 있는 바카라들만 바카라장에 남아있을 것만 같았다.


우리는 확실히 여유 있는 삶을 산다. 사고 싶은 바카라을 사고, 유행에 맞는 옷과 가구, 핫한 음식점의 요리, 이 모든 것들을 인터넷 몇 번의 클릭으로 집 앞에서 즐길 수 있다. 그러나 반대급부로 공간을 살 수는 없다. 물건으로 공간을 채울수록 공간에 대한 절대적 결핍으로 이어진다. 이제는 물건에 대해서는 여유 있는 삶이지만, 내가 비워내지 않으면, 절대로 새로운 것을 채워 넣을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음도 함께 알아챈다


이 시대에는 내 것이 아닌 것을 떠나보내고, 여유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진정한 사치가 아닐까? 내 것이 아닌 것을 떠나보내면 공간에 진짜 내 것으로만 채울 수 있겠지. 그리고 10년쯤 지나 내 바카라꽂이를 보면서 나는 생각겠지.


이 바카라장에 꽂혀진 바카라이 진정한 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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