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비어 있는 곳을 지나간다

비워진 자리에는 삶이 자란다

by아르망

꼿꼿하게 홀로 선 파는

속이 없다.


- 이문재 「파꽃」, 『제국호텔』(문학동네, 2004) -


"파는 속이 없다."

처음에는 조금 이상한 문장이라고 생각했다.


속이 없다는 말은

보통 비어 있다는 뜻이고,

비어 있다는 것은

무언가 부족하다는 뜻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래 바라볼수록

오히려 반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는

속이 비어 있기 때문에

바람이 지나갈 수 있고,

빛이 스며들 수 있으며,

끝내 꼿꼿하게 설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언가를 채우는 일에는 익숙하다.


지식을 채우고,

경력을 채우고,

통장을 채우고,

하루의 일정을 빈틈없이 채운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삶은 무엇으로 채웠는지를 자주 묻지만,

무엇을 비워 두었는지는 좀처럼 묻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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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고프면

꼬르륵 소리가 난다.


예전에는

그 소리가 불편했다.

얼른 무언가를 먹어야 한다는 신호처럼만 여겼다.

하지만 몸은

가끔 비워지는 시간을 통해

스스로를 다시 정돈하기도 한다.


배고픔은

언제나 부족함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비움은

새로운 회복이 시작되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마음도 다르지 않았다.


늘 무언가를 품고 살아간다.


끝나지 않은 걱정.

이미 지나간 후회.

아직 오지 않은 불안.

누군가의 말.

나를 향한 실망.


그렇게 마음은

조금씩 무거워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그것들을 오래 품는 법은 배웠지만,

잘 내려놓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비운다는 것은

애써 잊는 일이 아니었다.

억지로 밀어내는 일도 아니었다.


더 이상 나를 아프게 하지 못하도록

조용히 제자리를 돌려놓는 일이었다.


후회는

지난 시간에게.


불안은

오지 않은 내일에게.


미움은

바람에게.


그리고

오늘은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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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사람도

파를 닮아야 하는지 모른다.


속을 가득 채운다고

더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흘려보낼 수 있는 빈자리가 있을 때

비로소 오래 버틸 수 있으니까.


바람은

비어 있는 곳을 지나간다.

햇살도

비워진 자리를 먼저 찾아온다.


그래서 이제는

무언가를 더 가지기 위해 애쓰기보다,

무엇을 내려놓을 수 있을지를 먼저 생각해 본다.


오늘 하루의 조급함 하나.

나를 오래 붙잡고 있던 후회 하나.

괜히 움켜쥐고 있던 걱정 하나.


그 하나를 내려놓을 때마다

내 안에는

조금씩 숨이 드나드는 공간이 생긴다.


언젠가

내 마음에서도

조용히

'꼬르륵'

소리가 들리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무언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비워진 자리마다

새로운 삶이 천천히 자라고 있다는 신호로.


사람은

비워 낸 만큼

잃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살아갈 자리가 생긴다.


그래서

바람은

비어 있는 곳을 지나가고,

삶은

비워진 그 자리에

꼿꼿하게 뿌리를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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