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마음은 나를 잊지 않았다

좋아하는 게 뭐예요?

by아르망

가슴에 비가 뿌리되

옷은 젖지 않는 그 서늘함,

파초를 가꾸는 이 비를 기다림이

여기 있을 것이다.


- 이태준, 『무서록』, 청색종이, 2022 -



파초는 무척 여린 식물이다.

햇볕이 지나치면 잎이 마르고,

물이 지나치면 뿌리가 썩는다.


그래서 파초를 키우는 사람은 날씨보다 먼저 파초의 마음을 살핀다고 한다.

오늘은 목마르지 않을까.

오늘은 바람이 너무 차갑지 않을까.

오늘은 비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좋아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런 일인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돌보는 동안,

조금씩 그것을 닮아 가는 일.

관심을 주는 줄 알았는데,

어느새 관심을 배우고 있는 일.


좋아하는 마음에는 이상한 힘이 있다.

처음에는 이유를 말할 수 있다.


색이 예뻐서.

소리가 좋아서.

향기가 좋아서.


하지만 오래 좋아하게 된 것들은 더 이상 설명되지 않는다.


그냥 좋다.


그 '그냥'이라는 말속에는

수없이 함께 보낸 계절과,

말보다 긴 시간이 들어 있다.


뜨거운 여름날에 파초가 만든

푸른 그늘만 보아도 시원해지는 마음.

비 오는 날에 커다란 잎 위를 두드리는 빗소리가

괜히 오래 듣고 싶어지는 마음.


세상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좋아하는 것이 하나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평범했던 풍경이 조금씩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좋아하는 것은 세상을 바꾸지 않는다.

대신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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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가 밥을 먹여주지는 않지만

밥을 먹을 힘을 준다.


- 편은지 <덕후가 브랜드에게>, 은행나무, 2024 -


좋아하는 것은 현실을 대신 살아 주지 않는다.

대신 현실을 견딜 힘을 준다.


지친 하루 끝에서도 내일을 기다리게 만들고,

무너질 것 같은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


생각해 보면 사람은 거창한 이유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작은 기쁨을 조금씩 먹으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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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음이 이끄는 삶이란

낡지도 바래지도 않는다.


- 장참미 <좋아하는 마음엔 실패가 없지>, 부키, 2023 -


좋아하는 마음은 결과보다

시간을 사랑하게 만든다.


잘해서 계속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니까 계속하게 된다.


그래서 그 시간은 이미 실패가 아니다.

좋아하는 동안 우리는 이미 충분히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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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고 쓸모없는 것이라도 괜찮아요

사랑은, 모든 것이 될 수 있어요

나에게 반짝이기만 한다면요.


- 정지혜 <좋아하는 마음이 우릴 구할 거야>, 자기만의 방, 2020 -


아주 오래전, 누군가가 내게 물었다.

"좋아하는 게 뭐야?"


그 질문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남들이 좋아할 만한 것을 얼버무려 말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문득 스스로에게 다시 묻게 되었다.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게 뭘까.


어느새 나는

'해야 하는 일'은 잘 알고 있는데,

'좋아하는 일'은 선뜻 떠오르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런 날들이 이어지던 어느 날,

우연히 한 문장을 만났다.

그리고 또 한 문장을 만났다.


처음에는 그저 좋은 문장을 읽는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문장을 읽는 일이,

나를 읽는 일이 되었다.


좋은 문장을 오래 붙들고 있으면

신기하게도 문장이 나를 붙드는 날이 있었다.


나는 문장을 읽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문장이 잃어버린 나를 조금씩 찾아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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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였다.

길을 걷다가도

햇살이 나뭇잎 위에 머무는 시간을 오래 바라보게 되었다.


카페 창가에 앉아

사람들이 스쳐 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 일이 좋아졌다.


좋은 문장을 만나면

다음 장을 넘기기보다

한 문장을 오래 바라보게 되었다.


예전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하루가

이제는 자꾸만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아마 사람은

좋아하는 것이 생길 때

새로운 세상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렸던 자기 자신을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좋아하는 마음은 취미가 아니라,

삶의 방향이 된다.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들어 주는 작은 나침반이 된다.


이제는 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하찮고 쓸모없어 보여도,

나에게만 반짝이는 것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한 권의 바카라이어도 좋고,

한 줄의 문장이어도 좋고,

한 잔의 커피여도 좋다.


그 작은 반짝임 하나가

오늘을 살아갈 이유가 되어 줄 수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엇을 이루었는지는 자주 묻는다.

하지만 무엇을 좋아하며 살았는지는 좀처럼 묻지 않는다.


어쩌면 삶을 끝까지 버티게 하는 것은

거창한 성공이 아니라,

끝내 놓지 않았던 하나의 사랑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좋은 문장 하나를 천천히 펼친다.

언젠가 또 잃어버릴지 모르는 나를,

다시 만나기 위해.


사람은

좋아하는 것을 닮아 간다.

그래서 끝내,

무엇을 사랑했는지가

그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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