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부커상 수장 원작 화이트타이거의 메시지
넷플릭스 영화 <화이트 타이거>의 줄거리를 한 줄로 요약하면 돈에 눈이 먼 한 인간의 패륜적 범죄극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를 단순한 선악의 이분법으로 재단하는 것은 감독과 원작자가 숨겨둔 날카로운 통찰을 놓치는 일이다.
주인공 발람 할 와이는 결코 처음부터 비정하고 도덕성이 결여된 악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영화는 구제 불능의 시스템 속에서 한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한계 지어진 틀을 부수고 나오는지, 그리고 그 잔혹한 '알 깨기'를 통해 어떻게 이전 세대보다 한 단계 진화한 리더로 거듭나는지를 보여주는 서늘한 철학서에 가깝다.
발람이 모시던 주인 아쇽은 미국 유학파 출신으로, 겉보기엔 꽤 젠틀하고 진보적인 인물이다. 그는 발람에게 "선생님이라 부르지 말고 내 이름을 부르라"며 민주적인 평등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화려한 말들의 실체는 위기가 닥쳤을 때 여지없이 드러난다. 아내 핑키가 뺑소니 사고를 내자, 아쇽과 그의 가족은 주저 없이 그 억울한 죄를 발람에게 덮어씌운다. 말로는 자유와 평등, 인권을 부르짖지만, 정작 자신이 궁지에 몰렸을 때는 하층민의 고혈을 짜내고 바카라임을 전가하는 비겁함이 아쇽이 보여준 서구식 엘리트주의는 결국 나약한 껍데기이자 위선이었을 뿐임을 보여준다.
발람은 운전수로 일하면서 그들의 민낯과 더불어 정치인과 공권력이 뇌물로 얽히고설킨 인도슬롯에 만연한 부패의 사슬을 목도한다. 그런 가운데 그가 믿어왔던 '주인을 향한 맹목적인 충성'과 '선악의 기준'이 무너져 내린다.
이 영화에서 가장 시적이고 인상적으로 남는 은유는 핑키가 아쇽을 떠나 뉴욕으로 도망치던 공항 씬에 있다. 핑키는 "열쇠를 찾고 있었는데 사실은 내가 가지고 있었다"라고 말한다. 이는 '닭장(Rooster Coop)'이라는 거대한 억압의 문을 열 열쇠가 외부의 구원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 처음부터 자신들의 주머니 속에 있었다는 뼈아픈 자각이다.
그녀는 떠나면서 발람에게 돈 봉투를 쥐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그 액수가 깔끔하게 떨어지는 1만 루피가 아니라 '9,300루피'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부족한 700루피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발람 스스로 용기를 내고 결단하여 채워 넣어야 할 자신의 몫이었다.
핑키의 돈이라는 외부적 도움이 있더라도 알을 깨고 나오는 데는 오롯이 스스로 감당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작가의 메세지인 셈이다.
화이트 타이거는 돌연변이로 나오는 별종이다. 갇힌 '닭장'에서 뛰쳐나오는 '노예'도 별종이어야 가능하다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발람은 핑키가 돈을 주었을 때 곧바로 도망치지 않았다. 가족이 인질로 잡혀있다는 연좌제의 공포, 그리고 닭장 속의 세뇌가 아직 그를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조리한 세상의 진짜 룰을 깨달은 순간, 발람은 마침내 그 부족한 700루피의 용기를 쥐어 짜낸다.
발람의 살인과 돈가방 탈취는 단순한 범죄를 넘어선다. 그것은 마치 헤르만 헤세의 문장처럼, 하나의 세계(알)를 파괴하고 나오려는 초인적인 의지의 발현이다. 작가는 발람의 행동을 도덕적으로 옹호하지는 않지만, 스스로 한계 지어진 틀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으로 그려낸다.
흥미로운 것은 벵갈루루로 도망쳐 사업가로 성공한 발람의 그 이후 행보다. 발람 역시 구시대의 기득권들처럼 뇌물을 주고 불법을 저지르며 회사를 키운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자신의 회사 택시 기사가 밤길에 뺑소니 사고를 냈을 때, 발람의 대처는 과거 아쇽과는 완전히 달랐다.
발람은 남에게 죄를 덮어씌우지도, 기사를 버리지도 않는다. 그는 경찰에게 뇌물을 줘서 사법 처리를 막는 동시에, 피해자 가족을 직접 찾아가 진심으로 잘못을 시인하고, 돈으로 보상하며, 그 가족에게 취업의 기회까지 제공하여 위로한다.
비록 자본주의의 부패한 방식을 썼을지언정, 그는 적어도 자기 아래에 있는 사람을 소모품으로 버리지 않았고 자신의 비즈니스가 만든 결과에 대해 '직접 바카라임'을 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입으로만 평등을 외치며 하인에게 억울한 짐을 지우던 주인 부부보다 오히려 손에 피를 묻힌 발람이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된 리더'의 면모를 보여준다.
<화이트 타이거>는 구제 불능의 자본주의가 만든 지옥도를 그린다. 하지만 그 지옥 속에서도 하층민이 스스로 닭장을 부수고 나올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자신의 행동과 자기 사람들에 대해 온전히 바카라임을 지는 모습으로 조금 더 진화한 인간상을 묵직하게 던져준다.
https://youtu.be/iX1tx_zsRtI?si=tg-MomXHwFaatwYY
서사도 없이 요란하고 식상하기만한 할리우드 영화를 안 본지가 오래되었다. 요즘 인도영화를 보게 되면서 비교 분석해 본다. 참고로 발리우드란 말은 주로 인도영화가 봄베이에서 제작하기에 명명된 이름이다.
거대한 자본의 스펙터클 vs 다채로운 문화의 용광로
전 세계 영화 산업을 양분하는 두 거대한 축, 할리우드(Hollywood)와 발리우드(Bollywood)는 영화를 만들고 소비하는 방식에서 극명한 차이를 보여준다.
할리우드 영화가 거대한 자본과 상업성에 매몰되어 서사의 빈곤을 겪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반면, 발리우드를 비롯한 인도 영화는 특유의 문화적 깊이와 다양성을 무기로 인도 문화권을 넘어서 보다 많은 관객들을 사로잡고 있다.
할리우드 영화의 상업성 위주의 제작 방식은 필연적으로 '서사의 안전주의'를 낳고 보편적이고 단순한 선악 구도, 예측 가능한 3막 구조, 그리고 화려한 볼거리에 치중하다 보니, 인간 내면에 대한 깊은 탐구나 복잡한 슬롯적 메시지를 다루는 서사적 깊이는 갈수록 부족해지게 된다.
발리우드: 문화적 깊이와 '맛살라(Masala)'의 다양성
반면 발리우드 영화는 인도라는 거대한 국가의 복잡한 문화적 결을 그대로 스크린에 옮겨 놓는다.
인도의 향신료 '맛살라'처럼 로맨스, 액션, 코미디, 비극, 그리고 뮤지컬이 한 영화 안에 모두 섞여 있는데 이는 다양한 종교, 언어, 신분(카스트)이 공존하는 인도의 역동적인 슬롯상을 반영한 결과다.
발리우드 영화가 가족의 가치, 전통적인 윤리와 서구화되는 현대 슬롯의 충돌을 많이 다루기에 우리 한국인 정서와도 잘 맞아떨어진다. <화이트 타이거>외에도 넷플릭스에서 본 수십편의 인도영화들은 가난, 교육, 명예 , 여성 인권, 계급 갈등과 같은 묵직한 슬롯적 이슈를 깊이있게 녹여낸 작품들이 많았다.
발리우드 영화의 세계적 영향력
발리우드의 영향력은 중동, 아프리카, 동유럽 등지에서는 할리우드 영화보다 더 큰 인기를 끄는 경우가 많다. 서구 중심의 개인주의적 가치관보다, 가족애와 공동체의 가치를 중시하는 발리우드의 서사가 비서구권 관객들에게 더 깊은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넷플릭스, 아마존 프라임 등 글로벌 OTT 플랫폼의 성장은 인도 영화가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날개가 되었다. 인도 영화 특유의 춤과 노래를 줄이고 장르물과 슬롯 고발 서사에 집중한 <화이트 타이거> 같은 웰메이드 영화들이 세계적인 호평을 받고 있다. 인도 영화 특유의 에너지와 폭발적인 서사성은 이제 할리우드의 정형화된 블록버스터에 지친 세계 관객들에게 다양하고 매운맛의 매력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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