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만 가면 되는 편한 여행

아들 가이드로 떠난 일본여행

by김별

여행은 언제나 심장의 텐션을 올려준다.


이번 일본 여행이 유독 편했던 건 100% 무임승차였기 때문이다.

아들이 시종일관 모든 코스를 짰고, 남편이 큰 짐가방도 들어주니 나는 그저 영혼만 얹어 따라나섰다.


아들이 사는 아산에서 KTX를 타고 서울역을 거쳐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김포공항은 내게 사연이 깊은 곳이다. 1980년대 중반, 인천공항이 없던 시절 우연찮게 공항 대합실에서 남편과 극적인 재회를 했었으니 말이다.


저가 항공을 뒤지는 아들에게 "엄마 나이 되면 비행기 시간대가 더 중요하다"며 한 마디 했더니, 다행히 인간다운 시간에 이착륙하는 스케줄을 대령했다. 하기사, 어차피 일본은 두 시간도 채 안 걸리는, 그야말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다.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간사이 공항에 내리자마자 아들은 데이터 로밍을 체크한 뒤 곧바로 작전을 개시했다. 교토행 열차를 타기 전 편의점에서 주먹밥과 샌드위치, 우롱차를 신속하게 배급해 왔다.


"기차여행엔 간식이 국룰"이라며 나도 슬그머니 유명하다는 멜론빵과 스낵을 집어 들었다.

도착하자마자 맛보는 일본식 간식의 감칠맛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헬로 키티가 그려진 깜찍한 'JR 하루카' 열차를 타고 오후 5시 반, 거대한 인파가 쏟아지는 교토역에 상륙했다.


다행히 역 바로 앞인 호텔에 짐을 던져두고 미리 예약한 유서 깊은 장인정신 맛집 노포로 돌진했다. 입안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장어덮밥(히츠마부시)에 사케와 맥주를 곁들이니 비로소 일본에 온 게 실감 났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도지(교왕호국사)' 탑을 마주했다. 아파트 18층 높이의 거대한 목조탑이 밤바람 속에 우뚝 서 있는 모습은 묘하게 신비로웠다.


장어덮밥의 고소함과 도지탑의 웅장함, 이 두 가지 강렬한 인상으로 교토의 첫날밤이 깊어갔다.


70년 전통 노포 장어덮밥요리

이튿날 아침, 아들왈, "엄마, 교토에선 무조건 남들보다 30분 일찍 움직여야 해!"


교토는 794년부터 약 1,000년 동안 일본의 수도였던 곳이다.
서울보다 넓은 면적에 천 년의 세월이 압축되어 있으니 볼거리가 오죽하겠는가.


교토는 해외 관광객뿐 아니라 수학여행 학생들의 천국이기도 했다. 정말 끝없이 이어지는 교복 행렬을 보며, 전직 교사였던 나는 슬쩍 학생들 구경하는 재미에 빠졌다.

시골에서 상경했는지 때 묻지 않은 순진한 얼굴들, 교복을 반듯하게 입고 줄 맞춰 다니는 모습이 귀엽고도 안쓰러웠다.


'여행 와서까지 굳이 교복이라니… 편한 생활복이라도 입혀주지 싶었지만 언제나 단체 생활의 규칙은 개인의 자유보다 강한 법이었다.

대나무숲길 편안함과 인력거의 수고가 대비되게 느껴진다


아라시야마의 울창한 대나무 숲길을 지나 텐류지 정원의 다다미 건물에 매료되었다가, 점심으로는 정갈한 두부 소바 정식을 맛봤다. 우리나라 냉면처럼 차지 않고 적당히 시원한 소바 면이 내 속에 더 편했다.



노면전차를 타고 이동하는데 갑자기 하늘에 구멍이 난 듯 폭우가 쏟아졌다. 날씨가 추울 줄 알고 온통 긴팔만 챙겨 왔던 지라, 급히 근처 마트로 대피해 남편의 반팔 티셔츠를 하나 샀다. 다행히 쇼핑백을 들고 나오니 비가 거짓말처럼 그쳐 '금각사'로 향했다.


금각사(킨카쿠지)는 2층과 3층에 진짜 금박을 입힌, 그야말로 번쩍이는 사찰이다. 입장권 대신 부적처럼 생긴 기원문을 주는데, 관광 아이디어로 참 좋게 여겨졌다. 기념이 될 것 같아 나도 버리지 않고 가져와 내 방 벽에 붙여두었다.


금각사 3층 누각에는 계급 슬롯의 비밀이 숨어있다.
1층은 귀족 주택 양식, 2층은 무사 주택 양식, 3층은 불교 승려 양식이다.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귀족 위에 무사(나)가 있고,
그 무사 머리 꼭대기 위에 불교(출가한 나)가 있다"는 절대 권력의 세계관을
건물 한 채로 시각화한 것이다.

거울처럼 맑은 연못 위로 금빛 누각이 완벽하게 대칭되어 비치는 풍경은
여행객들을 몰려들게 하는 최고의 포토존다웠다.


금각사를 보고 다시 택시를 타고 시내로 나와 롯카쿠도를 들렀다. 롯카쿠도(六角堂)는 6세기 쇼토쿠 태자가 창건한 천태종 사찰이다. 본당이 육각형 모양이라 '롯카쿠도'라 불리며, 육각형 본당의 독특한 건축미와 더불어, 경내 신목인 버드나무에 소원을 빌면 좋은 인연을 만날 수 있다는 전설로 유명하다.


눈에 확 뜨이는 오방색이 펄럭였고 긴 줄을 잡아당기며 소원을 빈다고 해서 나도 해 봤다.


교토시내 롯카쿠도 육각형 사찰


복잡한 상가 안에 신사가 있다. 소뿔을 만지면 돈벼락을 맞는다는 말에 나도 잡고 남편 주식이 잘 되어 여행 도 많이 가고 맛있는 거 많이 사 먹게 해 달라 빌었다.

참 세속적이지만 여행도 체력과 돈이 있어야 하니.


저녁에는 데라마치 상점가의 백 년 된 노포 '키무라'에서 스키야키를 먹었다.

국물을 자작하게 졸여 건더기를 건져 먹는 방식을 보며, 자고로 국물에 진심인 우리 문화와 참 다르다는 걸 미각으로 체감했다.




결국 우리는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먹는 문화요,
그들은 숟가락 없이 젓가락으로
건더기를 건져 먹는 문화인 셈이다.

소화도 시킬 겸 본토초 전통 골목으로 접어들자 와규 굽는 냄새와 흥겨운 웃음소리가 골목 가득 실려 왔다.

길을 가다 기모노를 차려입은 모녀 같은 여인들과 기념촬영도 하고, 가모가와 강변의 시원한 밤바람을 맞으며 '여기가 진짜 일본의 전통과 문화 수도가 맞는구나' 싶었다.



큰길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귀가하는 길, 다리 위로 교토 대학생들의 축제 행렬이 지나갔다. 차창 너머로 흘러나오는 익숙한 밴드 음악 'YMCA'를 흥얼거리며, 교토에서의 인상 깊은 두 번째 밤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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