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세상에 영웅을 바라던 누군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다 만들어 놓은 내 영웅을 사랑에 또 빼앗겼군.”
이내 속이 쓰린 누군가는 생각했다.
‘슬롯에 변혁이 필요하다 생각해서 힘들게 함께했건만. 이번에도 사랑을 이기지 못하는가.’
어떤 이는 누군가에게 말했다.
“이번에도 내가 한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까 저 사랑을 빼앗아 갈 생각은 하지 마.”
누군가는 또 다른 영웅을 찾으러 홀연히 사라졌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다.
누군가는 수많은 영웅을 만났고, 그들을 키웠다.
처음에는 자신이 사람을 보는 눈이 남다르다고 믿었다.
누군가에게는 용기를 가르쳤고,
누군가에게는 분노해야 할 이유를 가르쳤으며,
누군가에게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꿈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충분히 강해졌다고 생각할 때쯤, 언제나 무언가가 나타났다.
어떤 영웅은 권력에 무릎을 꿇었다.
어떤 영웅은 명예를 좇기 시작했다.
어떤 영웅은 돈을 원했고,
또 어떤 영웅은 사람들의 사랑과 인정을 원했다.
그리고 또 어떤 영웅은 사랑에 빠졌다.
그때마다 누군가는 실망했다.
“그래도 네가 이럴 수는 없지.”
그는 영웅들에게 그렇게 말했다.
“너는 다른 사람들과 달라야 하잖아.”
하지만 그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했을 뿐이었다.
누군가는 그들을 버리고 다시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섰다.
처음에는 자신이 잘못 고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음에는 자신이 사람을 너무 믿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다음에는 세상이 생각보다 더 타락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의 영웅들을 하나씩 바꿔 끼우면서도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또다시 길을 떠났다.
어느 날, 오랜 방랑 끝에 산속 깊은 곳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한 노인이 작은 바둑판 앞에 앉아 있었다.
바둑판에는 흑돌과 백돌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누군가는 한동안 그 판을 바라보다 물었다.
“무엇을 하고 있소?”
노인이 대답했다.
“기다리고 있네.”
“무엇을?”
노인은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
“그대는 무엇을 찾아 헤매는가?”
누군가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영웅을 찾고 있소.”
노인이 웃었다.
“아직도?”
누군가는 그 말에 기분이 상했다.
“아직도라니?”
“그대가 그토록 찾아다니던 영웅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누군가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대답했다.
“길을 잃었소.”
“왜?”
“욕망 때문이오.”
“사랑 때문이기도 했겠지.”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바둑판에서 흑돌 하나를 집었다.
“그대는 이것을 무엇이라 부르는가?”
“흑돌.”
“사람들은 여기에 어떤 의미를 붙이는가?”
누군가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욕망. 어둠. 악 같은 것.”
노인이 흑돌을 손바닥에 굴렸다.
“그럼 이 돌 때문에 그대의 영웅들이 무너졌다고 생각하는가?”
“적어도 많은 경우에는 그랬소.”
“사랑에 빠진 사람도?”
누군가는 대답하지 못했다.
노인은 백돌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백돌.”
“사람들은 여기에 무엇을 붙이는가?”
“의지. 절제. 선.”
노인은 잠시 두 돌을 손에 쥔 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무엇이 말이오?”
“그토록 다른 것처럼 부르면서도, 둘 다 결국 돌일 뿐이네.”
누군가는 피식 웃었다.
“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니잖소.”
“맞네.”
노인이 말했다.
“돌이 아니라 사람을 이야기하고 있지.”
누군가는 곧바로 반박했다.
“그래도 욕망은 사람을 망칩니다.”
“그렇지.”
“사랑 때문에 사람은 자신의 뜻을 버리기도 하오.”
“그렇지.”
“그런데 왜 그것을 꼭 나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오?”
노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나쁘다고 말하지 않았네.”
“그럼?”
“모르겠다고 말한 것이지.”
누군가는 그 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평생 사람을 판단해왔다.
누가 영웅이 될 사람인지,
누가 변절할 사람인지,
누가 끝까지 버틸 사람인지.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어야 했다.
원인과 결과가 있어야 했다.
그런데 노인은 그것을 너무 쉽게 흐려버리는 것 같았다.
“모른다고 해서 되는 일이오?”
누군가가 물었다.
“세상은 그렇게 살 수 없소.”
노인은 아무 말 없이 바둑판을 바라보았다.
그날은 그것으로 끝났다.
누군가는 다음 날에도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에도.
그는 노인에게 계속 질문했다.
“그렇다면 권력을 좇는 사람도 나쁜 사람이 아니오?”
“모르지.”
“명예에 눈먼 사람도?”
“모르지.”
“자신의 사랑을 위해 동료를 떠나는 사람도?”
노인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사람에게 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그 사람만 알겠지.”
누군가는 답답했다.
“그렇게 따지면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지 않소.”
“그럴 수도 있네.”
“그럼 무엇이 옳은지 어떻게 아오?”
“걸어봐야 알겠지.”
누군가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떠나지도 않았다.
어느 날 밤, 산에 짙은 안개가 내려앉았다.
노인이 등불을 켰다.
강한 빛이 바둑판 위를 스쳤다.
그 순간 흑과 백 사이에서 이상한 것이 번쩍였다.
유리구슬 같은 돌이었다.
누군가는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저것은?”
노인이 대답했다.
“이름이 없는 돌.”
“왜 이제야 보이는 것이오?”
“늘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럼 왜 아무도 못 보는 거요?”
“너무 어둡거나, 너무 밝을 때만 잠깐 모습을 드러내니까.”
누군가는 그 돌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저것도 무언가를 의미하오?”
“아마도.”
“무엇을?”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네.”
누군가는 헛웃음을 지었다.
“노인은 정말 모르는 것이 많군.”
“그대도 그렇지 않은가.”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그날 밤 누군가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다음 날 그는 산을 내려갔다.
그렇다고 영웅 찾기를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신중하게 사람을 골랐다.
이번에는 사랑에 흔들리지 않을 사람.
권력에 욕심내지 않을 사람.
명예보다 대의를 중시하는 사람.
그는 그런 사람을 찾고 또 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한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은 이전의 영웅들과 달랐다.
욕심이 없어 보였고,
칭찬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았으며,
어려운 일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누군가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번에는 다르다.’
그는 그 사람을 도왔다.
시간과 돈과 노력을 쏟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뜻을 밝히는 날이 왔다.
많은 사람들이 환호했다.
누군가는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웃었다.
‘드디어 찾았다.’
하지만 몇 년 뒤, 그 사람 역시 권력을 손에 넣었다.
처음에는 변화를 만들기 위해서라고 했다.
조금씩 달라졌다.
처음에는 자신이 옳다고 믿었고,
그다음에는 자신만이 옳다고 믿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다시 배신감을 느꼈다.
예전 같으면 그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찾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노인의 말이 떠올랐다.
‘모른다고 말한 것이지.’
누군가는 처음으로 영웅을 판단하는 대신 그 사람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가 언제부터 변했는지 생각했다.
처음부터 욕심이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좋은 일을 하다 보니 권력을 필요로 하게 된 것인지.
어느 쪽인지 쉽게 알 수 없었다.
그날 누군가는 처음으로 영웅을 버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옳다고 인정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판단을 조금 늦추었다.
그리고 아주 작게 생각했다.
‘사람은 생각보다 복잡한 존재인지도 모르겠군.’
그것이 그의 첫 번째 변화였다.
아주 작은 변화였다.
그 후에도 누군가는 계속 사람을 만났다.
여전히 실망했다.
여전히 화가 났고,
여전히 어떤 선택은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전처럼 사람을 영웅과 실패작으로 나누지는 못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욕망 때문에 무너졌다가 다시 일어섰고,
어떤 사람은 선한 뜻으로 시작했다가 잔인한 사람이 되었다.
반대로 이기적인 욕망을 가지고 시작한 사람이 뜻밖의 일을 해내기도 했다.
누군가는 점점 이상한 질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영웅을 만드는 것은 대체 무엇이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어느 날 그는 다시 노인을 찾아갔다.
노인은 예전처럼 바둑판 앞에 앉아 있었다.
누군가는 말했다.
“아직 모르겠소.”
노인이 웃었다.
“무엇을?”
“영웅이 무엇인지.”
“그래서?”
누군가는 한참 생각하다 대답했다.
“예전에는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소.”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모르겠소.”
“그것으로 충분하네.”
하지만 누군가는 아직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다시 물었다.
“그래도 누군가는 세상을 바꿔야 하지 않소?”
“그렇지.”
“그 누군가는 누구요?”
노인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길을 걸었다.
조금 내려가자 길 한가운데 작은 돌 하나가 놓여 있었다.
노인은 허리를 굽혀 그것을 치웠다.
누군가는 웃었다.
“그게 세상을 바꾸는 일이오?”
노인이 말했다.
“오늘 이 길을 걷는 사람 하나는 넘어지지 않겠지.”
누군가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계속 걷다 보니 또 다른 돌이 보였다.
이번에는 누군가가 먼저 그것을 집었다.
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며칠 뒤에는 길에서 넘어진 사람을 발견했다.
누군가는 잠시 망설였다.
예전 같으면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위대한 인물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날은 손을 내밀었다.
“일어날 수 있겠소?”
상대가 그의 손을 잡았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그 누구도 그를 영웅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런 일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길에 돌이 있으면 치웠고,
넘어진 사람이 있으면 일으켰고,
혼자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잠시 곁에 섰다.
처음에는 그것이 영웅을 찾는 것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영웅을 찾는 동안에도 세상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을.
누군가가 오늘 힘들어하면 오늘 도와야 했고,
길에 돌이 놓여 있으면 누군가가 치워야 했다.
영웅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그 무렵 그는 다시 바둑판을 떠올렸다.
흑돌과 백돌.
욕망과 의지.
사람들은 그것을 선과 악이라고 부르지만, 결국 돌이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이 돌을 보고 무엇을 할지 결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도 그 바둑판 위의 한 사람일 뿐이었다.
그때 그는 처음으로 아주 이상한 생각을 했다.
‘어쩌면 나는 영웅을 찾고 있었던 게 아니라, 영웅에게 내 몫의 걸음을 대신 걸어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그 생각은 한 번에 그를 바꾸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영웅을 보고 싶었다.
여전히 세상을 크게 바꾸는 사람을 존경했다.
여전히 어떤 사람에게는 “당신이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이제는 그 사람을 기다리면서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싫었다.
그래서 그는 작은 일을 했다.
그리고 그 작은 일들이 쌓여갔다.
어느 밤, 아주 긴 하루를 마치고 혼자 걷던 중이었다.
멀리서 강한 불빛 하나가 비쳤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익숙한 섬광을 보았다.
흑과 백 사이에서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유리구슬 같은 빛.
그는 걸음을 멈췄다.
예전 같았으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려 했을 것이다.
선인지 악인지,
경계인지 초월인지,
세상의 비밀을 담은 돌인지.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걸었다.
그 돌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몰랐다.
자신이 영웅인지도 몰랐다.
앞으로 자신이 무엇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
다만 한 가지는 알았다.
흑돌과 백돌이 무엇을 속삭이든,
결국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은 자신이라는 것을.
그날 이후 그는 더 이상 영웅을 찾아 헤매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영웅을 찾고 싶은 마음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마음 때문에 자신의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세상은 여전히 흑과 백의 돌들로 가득했다.
누군가는 욕망 때문에 흔들렸고,
누군가는 의지 때문에 버텼으며,
누군가는 사랑 때문에 떠났고,
누군가는 사랑 때문에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아주 드물게, 극단의 순간에는 이름 없는 돌이 섬광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아마 앞으로도 모를 것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계속 걸었다.
누군가는 큰일을 했고,
누군가는 작은 일을 했다.
누군가는 세상을 바꾸었고,
누군가는 바로 눈앞의 길을 조금 편하게 만들었다.
훗날 사람들은 그 시절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때는 영웅이 없었지만, 세상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아무도 그 변화의 시작이 누구였는지는 알지 못했다.
아마도 영웅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어느 날,
길 위에 놓인 작은 돌 하나를 치운 누군가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