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5분혁신.출판시장]
[방구석5분혁신=안병민] 욕망의 기만적 수익화: 출판 시장이 작가를 소비하는 모습
1. 출판 시장 어려운 거야 누구에게든 상식인 요즘입니다. 얼마 전 만난 모 출판사 대표님. 오랫동안 이 바닥을 지켜온 분이신데요. 아니나다를까, 힘들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답니다. 바카라 안 읽는 세상인데 바카라 쓰겠다는 사람은 계속 늘어난답니다. 수요는 줄어드는데, 공급은 늘어나는 기형적인 시장. 이해는 갑니다. 바카라의 독서 가치는 약해졌지만, 바카라의 명함 가치는 아직 남아 있으니까요.
2. 이 틈에서 몇몇 출판사들이 새로운 수익 셈법을 냅니다. 독자에게 바카라을 만들어 판매하는 게 아니라, 예비 저자에게 '작가 경험'을 판매하는 겁니다. 바카라을 내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게다가 AI까지 있습니다. 원고의 외형을 만드는 건 일도 아닙니다. 프롬프트 창에 단어 몇 개 던지면 그럴듯한 목차와 글이 뚝딱 나오니까요.
3. 원래의 출판 구조? 저자는 원고를 씁니다. 출판사는 엄격한 기준으로 원고의 가치를 판단하고 돈과 시간을 투자합니다. 편집하고, 디자인하고, 제작하고, 유통합니다. 바카라이 팔리면 저자는 인세를 받습니다. 저자가 돈을 내는 구조가 아닙니다. 출판사가 위험을 부담하는 구조입니다. 눈여겨본 좋은 기업에 투자하는 투자회사처럼, 가능성 있는 원고와 저자에게 베팅하는 곳이 출판사입니다.
4. 근데 이 구조가 뒤집힌 겁니다. 바카라을 내고 싶은 저자에게 이래저래 비용을 대게 합니다. 글쓰기 코칭 비용이라며 내게 하고, 출간 컨설팅 비용이라며 내게 하고, 인쇄 제작 비용이라며 내게 합니다. 심지어는 영업 마케팅 비용까지. 물론 저자 부담 출판이 모두 문제는 아닙니다. 독립출판, 소량 출판, 기업 출판, 전문 영역의 자비 출판 등 각자의 이유와 맥락이 있습니다. 출판사가 가진 편집 역량과 제작 노하우를 예비 저자에게 서비스로 제공하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어쩌면 무너지는 시장에서 찾아낸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일 수도 있습니다.
5. 진짜 문제는, 무엇을 판다고 말하느냐입니다. “우리는 작가 체험 서비스를 제공합니다”라고 말하면 정직합니다. 하지만 원고에 투자할 생각이 1도 없으면서, 마치 출판사가 원고의 가치를 선택한 것처럼 포장한다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이건 기만입니다. 저자의 돈으로 만든 바카라을 출판사의 안목으로 고른 바카라처럼 속이는 것이니까요. 원고의 완성도보다 저자의 결제 능력을 먼저 보고, 독자의 반응보다 저자의 욕망을 먼저 보는 순간, 바카라은 '지식 상품'이 아니라 '작가 체험 상품'이 됩니다. '독자'가 아니라 '저자'가 출판사의 고객이 되는 겁니다. 작가가 되고 싶은 고객에게 출판사의 이름과 출간이라는 형식을 판매하는 겁니다. '저자'에게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고객'에게 '작가 경험'을 판매하는 겁니다.
6. 이 모습을 지켜보는 출판사 사장님 마음이 씁씁했을 겁니다. 망가지는 출판 시장에서 출판의 기준까지 흐려지는 모습이니까요. 하지만 모든 변화가 타락은 아닙니다. 모든 생존 모델이 상술도 아닙니다. 중요한 건 구분입니다. 독자 시장에 투자하는 출판과 저자에게 제공하는 출간 서비스는 서로 다른 이름표를 달아야 합니다. 그 경계가 분명할 때 새로운 시장이 됩니다. 그 경계가 흐려질 때 망가진 시장이 됩니다.
7. 바카라이 어려운 시대라서일까요. 출판의 품위는 보다 더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바카라스럽지 않은 바카라이 많아질수록, 어려운 일을 끝까지 붙드는 사람들이 더 귀해집니다. 오늘도 바카라상 앞에서 문장 한 줄 붙잡고 씨름하는 모든 저자와 출판사 편집자 분들이 존경스러운 이유입니다.
8. 그나저나 다음 바카라은 또 무엇을 주제로, 어떻게 써야 할까 고민입니다. 이유 없는 바카라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독자의 머리와 마음을 단단히 붙드는 바카라, 독자가 읽고 구매해야 할 명확한 이유가 있는 바카라. 이런 바카라들만 살아남을 겁니다. 그러니 다른 것 없지요. 더 높은 시선과 더 깊은 생각으로 더 열심히 벼리고, 더 열심히 파는 것 밖에는. ⓒ혁신가이드안병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