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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슬픈 눈
"민유방본이요, 본고방녕이라. 백성은 오직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굳어야 나라가 편안하다 하였사옵니다."
보덕의 낭독이 비현각의 아침을 갈랐다. 창호 너머로 밝아 오는 빛이 방 안에 비스듬히 내려앉은 시각, 전날 익힌 문장을 세자가 먼저 새기고 새 문장은 관원이 앞서 읽어 주면 세자가 받아 읽는 것이 서연의 법도였다. 보덕과 필선이 좌우에 앉고 문학과 설서가 그 아래에 배석한,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서연이었다.
낭독이 끝나고 방 안이 조용해졌는데, 받아 읽어야 할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필선이 조심스레 헛기침을 보탰다.
'아, 내 차례.'
의경은 뒤늦게 바카라장으로 눈을 내리고 소리 내어 읽었다. 신기하게도 입은 글자를 곧잘 짚어 나갔다. 걸음마 무렵에 한문을 포기한 머리로도 술술 읽히는 것은 이 몸이 지닌 기억 덕인데, 정작 그 머리가 지금 글이 아닌 데로 새고 있었다. 받아 읽는 입 따로 생각 따로인 것이 스스로도 느껴질 지경이었다.
돌이켜 보면 조짐은 첫 순서부터 있었다. 전날 배운 대목을 새기는 자리에서 같은 줄을 두 번 읽는 바람에, 사서를 받든 문학이 민망한 낯으로 바카라장을 짚어 주었던 터였다.
사냥 행차에서 돌아온 것이 바로 어제였다. 피로 탓이라 하기엔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이 너무 또렷했다. 닫히는 과거장 문틈으로 몸을 던지던 여인, 매질에 나동그라지면서도 놓지 않던 종이 뭉치, 그리고 그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입술만 깨물던 한 사람. 웃고 떠드는 소란의 한복판에서 홀로 젖은 눈을 하고 섰던 그 얼굴이, 어제오늘 내내 글자보다 진하게 남아 있었다. 그날 이후로 붓을 들어도 활을 잡아도, 마음 한 자락은 줄곧 거기 두고 온 사람 같았다.
'끝을 맺지 못한 말이 하나 있었지.'
시험이 파한 뒤 궁으로 드는 길목에서 나눈 짧은 문답. 오간 말은 몇 마디뿐이었는데 그 짧은 주고받음의 무게가 만만치 않아서, 밤에 눈을 감아도 그 길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답이 나오기 전에 길이 먼저 끝났고, 그 뒤로는 사냥이다 문서다 하며 서로 어긋나기만 했다.
보덕이 새 구절의 뜻을 풀이하고 해석을 청하는 눈으로 세자를 보았다. 침묵이 두 번째로 길어지자 두 관원이 슬며시 눈짓을 주고받았다.
"저하, 옥체 미령하시옵니까."
"괜찮다. 다시 읽지."
의경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글줄에 힘주어 눈을 붙였다. 하나같이 좋은 말들인데, 그 위로 자꾸 한 사람의 눈매가 겹쳐 글자를 지웠다.
서연 말미에는 설서가 물과 배의 옛말을 보태었다. 백성은 물이요 임금은 배이니, 배를 띄우는 것이 물이나 그 배를 엎는 것 또한 물이라는 풀이에 좌중이 수긍하는 기색이었고, 의경은 공연히 붓대를 만지작거렸다.
서연이 파하고 관원들이 자리를 뜬 뒤, 의경은 문갑 위에 놓아 둔 문서를 끌어당겼다. 채윤이 어제 다녀가며 시강원에 맡기고 간 사냥 보고였다. 하필 그 시각에 잠들어 있던 탓에 얼굴도 보지 못하고 종이만 받아 든 참이었다.
'부탁해 둔 일도 있겠다, 문서 물을 것도 있겠다. 안 부를 이유가 없잖아?'
부를 거리를 속으로 꼽아 보다가 문득 헛웃음이 났다. 궁금한 게 있으면 부르면 그만인 자리에 앉아서, 그 당연한 일에 구실부터 챙기고 있는 스스로가 낯설었다.
"권신."
"예, 저하."
"예문관 채윤을 비현각으로 들라 하라."
권신이 짧게 예를 표하고 나가자, 의경은 보고서를 폈다가 몇 줄 읽지 못하고 제자리를 돌았다. 멧돼지의 크기며 행차의 경과며 분명 아는 내용인데 눈이 글 위를 헛돌기만 했다. 그나마 끝까지 읽힌 것은 몰이꾼 하나하나의 노고까지 챙겨 적은 대목뿐이어서, 입가가 느슨히 풀렸다가 지금 웃을 때인가 싶어 얼른 낯을 고쳤다. 빛이 문갑 모서리에서 서안 쪽으로 한 뼘쯤 자리를 옮기는 동안, 같은 장을 거듭 펼치고 있었다.
곧 밖에서 기척이 일더니, 아뢰는 소리가 문을 넘어왔다.
"예문관 채윤, 저하를 뵈옵니다."
부복이 여느 때보다 깊어 이마가 바닥 가까이에서 한동안 머물렀고, 몸을 일으키라는 말에도 반쯤만 세웠으며, 소매 밖으로 나온 손끝은 어느새 안으로 말려 들어가 있었다. 매무새는 흐트러짐 하나 없는데, 목덜미에 밴 긴장만은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불러 놓고 보니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정작 준비가 덜 된 쪽은 저였다.
'뭐지. 내가 잡아먹기라도 하나.'
"편히 앉게."
"…예."
채윤이 방석 맨 끝에 엉거주춤 걸치듯 앉았다. 창호를 넘어온 볕이 두 사람 사이의 서안을 반으로 갈랐다. 의경은 문서를 사이에 두고 먼저 공적인 것들을 물었다. 보고 문면에는 빈틈이 없었고, 답하는 소리에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보고는 잘 보았다. 몰이꾼들의 이름까지 적은 것은 그대 생각인가."
"…수고한 이들이라, 남겨 두고 싶었사옵니다."
일한 이를 잊지 않는 대답이 어쩐지 귀에 남았다.
"맡기신 일은… 눈에 띄지 않게 살피는 중이옵니다. 조금만 더 말미를 주시옵소서."
"서두를 것 없다. 소리 없이 하는 쪽이 백번 중하니."
"명심하겠사옵니다."
다만 그 한마디를 빼면 대답마다 모서리가 자로 잰 듯했고, 그래서 오히려 밤새 다듬어 온 티가 났다. 짧은 문답이 끝나자 방 안에 어색한 정적이 고였다. 채윤의 시선은 줄곧 바닥의 한 점에 묶여 있었고, 그 빳빳한 자세가 무엇을 각오하고 있는 것인지 의경으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의경은 반쯤 넘기다 만 보고서를 소리 나게 덮었다.
"문서는 핑계다."
핑계라는 두 글자에 채윤의 어깨가 눈에 띄게 굳었다.
"그날, 시험이 파하고 함께 걷던 길에 내가 물었던 것을 기억하나."
"…기억하옵니다."
"슬프냐 물었고, 그대는 답을 미뤘고, 나는 나도 슬프다 했지. 그럼 어떻게 할까, 거기서 그쳤다."
말을 이으면서 서안 너머로 몸이 조금 기울었다.
"오늘은 그 앞을 묻고 싶다. 무엇이 그대를 그런 눈으로 만드나."
채윤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는데, 단단히 각오하고 온 물음들과 전혀 다른 데서 화살이 날아든 얼굴이었다. 입술이 달싹이다 이내 다물리고, 눈길이 서안 모서리로 미끄러졌다.
"소인이… 미욱하여 낯빛을 다스리지 못했을 뿐이옵니다."
"그대는 거짓에 재주가 없군."
잘라 낸 말에 채윤의 손등에 힘줄이 돋았다. 침묵이 길어지는 동안 의경은 재촉하지 않았다. 고작 가만히 앉아 있는 일이 이토록 어려운 줄은 미처 몰랐다. 마당의 모래알을 쓸어 가는 바람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고, 무릎 위에 얹은 제 손끝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 있어 의경은 슬그머니 손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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