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취향은 가장 비싼 생산수단이 된다
K팝 시장은 자본의 힘이 강하게 작동하는 산업이다.
좋은 곡을 받고, 유명한 제작진을 붙이고, 뮤직비디오와 마케팅에 많은 돈을 투입할수록 유리하다.
대형 기획사가 신인 그룹을 내놓는 순간부터 주목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 시장에서 리센느 같은 중소 기획사 아이돌이 흥미로운 이유가 있다.
대형 기획사와 같은 방식으로 더 크게 싸우기 어렵다면, 결국 다른 방식으로 기억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리센느라는 이름에는 향기를 통해 장면과 기억을 다시 불러낸다는 이미지가 담겨 있다.
음악과 비주얼에서도 이런 감각적인 방향을 이어간다.
중요한 것은 콘셉트 자체가 아니다.
그룹을 보고 난 뒤 대중에게 남는 어떤 느낌이다.
노래 한 곡만 놓고 보면 비슷한 음악이 있을 수 있고, 사진 한 장만 놓고 보면 비슷한 스타일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음악과 의상, 이미지와 영상이 쌓이면 어느 순간 하나의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사람들은 그때부터 이렇게 느낀다.
‘여기는 뭔가 다르다.’
자본의 차이를 단숨에 뒤집기는 어렵다.
하지만 차이는 반드시 돈으로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민희진이 만든 것은 하나의 콘셉트가 아니다
민희진을 뉴진스의 제작자로만 보면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된다.
그 이전에도 소녀시대, 샤이니, f(x), EXO, Red Velvet 등 서로 다른 아티스트들의 비주얼과 콘셉트 작업에 참여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그룹들이 서로 닮지 않았다는 것이다.
f(x)를 뉴진스처럼 만들지도 않았고, 뉴진스를 과거 SM의 아티스트처럼 만들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그 작업들을 따라가다 보면 공통적인 태도가 보인다.
이미 시장에서 성공한 것을 조금 더 잘 만드는 것보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감각을 먼저 끌어내려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제작자의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철학이 있다는 것은 모든 제품을 똑같이 만든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대상이 달라져도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지에 대한 기준이 있다는 뜻에 가깝다.
어떤 음악을 고를지, 어떤 사진을 메인으로 사용할지, 어떤 옷을 입힐지, 어디까지 보여주고 어디에서 멈출지.
이런 작은 결정이 수백 번 쌓이면 결과물에 한 사람의 시선이 남는다.
우리는 그것을 흔히 ‘취향’이라고 부른다.
많은 기업이 시장조사를 한다.
지금 어떤 제품이 팔리는지 확인하고, 어떤 디자인이 인기 있는지 분석한다.
콘텐츠 산업에서는 어떤 음악과 영상이 조회수를 얻는지 데이터로 살펴본다.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데이터가 보여주는 것은 대부분 이미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확인된 것이다.
내가 성공 사례를 발견했다면 누군가는 이미 그것을 만들었다.
그것을 분석해 기획하고 제품으로 내놓을 때쯤이면 다른 경쟁자들도 같은 데이터를 보고 있다.
그러면 시장에는 비슷한 것이 늘어난다.
품질은 계속 좋아지는데 이상하게 기억나는 것은 줄어든다.
유행을 가장 충실하게 좇은 결과가 오히려 평범함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강한 제작자는 유행을 무시하지 않는다.
대신 그대로 복사하지 않는다.
자신의 기준을 통과시켜 필요한 것만 가져온다.
결국 중요한 것은 유행을 얼마나 빨리 발견하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다.
좋은 취향은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취향이라는 단어를 조금 다르게 볼 필요가 있다.
좋은 옷을 좋아하고, 좋은 음악을 많이 듣고, 예쁜 공간을 찾아다닌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제작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제작에서 취향은 감상이 아니라 판단에 가깝다.
좋다고 느끼는 이유를 알고, 무엇이 과한지 판단하며, 더 넣을 수 있는데도 어디에서 멈춰야 하는지를 아는 능력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지 않을 것을 결정하는 것이다.
기술이 뛰어난 사람은 가능한 선택지를 늘릴 수 있다.
그러나 좋은 제작자는 그 많은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고르고 나머지를 버린다.
그래서 취향은 단순한 개인적 선호가 아니다.
오랜 시간 경험과 실패, 관찰과 선택이 축적되어 만들어진 하나의 의사결정 시스템에 가깝다.
생각해보면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나 발견된다.
어떤 카페에 들어가면 가구와 조명, 컵과 음악이 서로 다른 물건인데도 이상하게 하나의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어떤 호텔은 방 하나만 보아도 그 브랜드가 떠오른다.
자동차도 그렇고 패션도 그렇다.
건축과 음식, 출판과 IT 서비스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좋은 기업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고유의 향기가 있다.
제품은 계속 바뀌지만 느낌은 남는다.
그렇다면 기업을 볼 때 무엇을 만드는가와 함께 다른 질문도 해야 한다.
누가 마지막 선택을 하고 있는가.
왜 오너와 제작자의 취향이 중요한지 여기에서 드러난다.
기업에는 수많은 보고서와 시장조사 자료가 올라온다. 숫자로 보면 합리적인 선택도 여러 개다.
결국 마지막에는 누군가 결정해야 한다.
이것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저것을 버릴 것인가.
강한 브랜드는 이런 선택이 오랫동안 축적된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좋은 기업에는 제품보다 먼저 판단의 일관성이 존재한다.
그리고 AI의 발전은 이 구조를 더욱 선명하게 만들 것이다.
예전에는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구현하는 것이 어려웠다.
이미지를 만들려면 디자이너가 필요했고, 영상을 만들려면 촬영과 편집 인력이 필요했다.
음악과 광고, 글과 제품 설계에도 각각 전문적인 기술과 비용이 들어갔다.
AI는 이 장벽을 빠르게 낮추고 있다.
앞으로 한 사람이 만들 수 있는 결과물의 양은 지금보다 훨씬 많아질 것이다.
그런데 모두가 수백 개의 이미지를 만들고, 수백 개의 문장을 쓰고, 수십 개의 디자인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면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
그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AI가 선택지를 늘릴수록 오히려 선택하는 사람의 능력이 중요해진다.
무엇이 좋은지 알아보는 눈, 무엇이 자신다운지 판단하는 기준, 지금 잘되더라도 하지 않을 것을 버릴 수 있는 철학이 필요하다.
과거에는 만드는 기술 자체가 희소했다.
앞으로 기술이 보편화된다면 희소한 것은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기술이 흔해질수록 기준을 가진 사람이 비싸진다.
산업 시대의 생산수단은 공장이었다.
인터넷 시대에는 소프트웨어와 플랫폼, 데이터가 중요한 생산수단이 됐다.
AI 시대에는 여기에 조금 낯선 자산이 하나 더해질 수 있다.
사람 안에 오랫동안 축적된 취향과 철학이다.
AI에게 같은 도구를 주어도 결과가 다른 이유는 모델만의 차이 때문이 아니다.
사용하는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다르고, 무엇을 질문하는지 다르며, 수많은 결과 가운데 무엇을 남길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결국 AI 시대의 경쟁은 ‘누가 더 좋은 AI를 가지고 있는가’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AI가 누구에게나 주어진다면 마지막에 남는 질문은 오히려 인간에게 돌아온다.
당신은 무엇을 만들고 싶은 사람인가.
리센느와 민희진의 사례가 흥미로운 이유도 결국 이 질문과 연결된다.
회사 규모가 모든 것을 결정하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것을 만들 수 있는지도 전부가 아니다.
사람들이 오래 기억하는 것에는 대개 누군가의 집요한 선택이 들어 있다.
자본은 더 크게 만들 수 있다.
기술은 더 빠르게 만들 수 있다.
AI는 거의 무한히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지는 결국 사람이 결정한다.
그래서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시대가 가까워질수록 역설적으로 가장 희소해지는 것이 있다.
자신만의 것을 알아보는 눈이다.
어쩌면 AI 시대의 가장 비싼 생산수단은 공장이나 소프트웨어가 아닐지도 모른다.
세상은 복잡하지만, 핵심은 단순합니다.
저는 당신에게 정보가 아닌 ‘프레임’을 건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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